권천학의 수필방

아름다운 뒷모습

천마리학 2018. 7. 5. 06:41




아름다운 뒷모습

권천학





  • 캐나다 한국일보 (public@koreatimes.net) -- 
  • 04 Jul 2018

  •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 시인


    요즘 윌로우데일의 28, 29선거구에서는 10월에 있을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한인후보자들이 정치입문의 의욕을 불태우며 판세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중에 며칠 전 현의원인 존 필리언이 불출마 선언을 했다. 보도내용에 따르면 그는 1981년 노스욕 교육감으로 정계에 발을 디뎠고, 91년 시의원으로 당선, 98년 노스욕이 토론토시로 통합되면서 토론토 시의회로 진출, 이후 선거 때 마다 50%를 훌쩍 넘기는 지지율로 재선되며 윌로우데일의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따라서 이번에도 출마를 예상했던 그가 정계은퇴를 선언, 그의 수석 보좌관인 마커스 오브라이언과 또 다른 보좌관 릴리 쳉이 28, 29선거구에서 각각 출마한다고 한다. 28선거구는 박탁비씨와 박건원씨가, 29선거구에는 조성용씨가 출마할 곳으로, 지지기반이 든든한 터줏대감이 물러앉았으니 선거 판세가 다소 유리하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나온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면서, 해당 선거구역이 아니어서 이웃동네 이야기 정도로 들어 넘길 수밖에 없는 아쉬움이 크지만, 그래도 내가 사는 토론토에서 한인의원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나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이야 누구 못지않다.


    정치에 아는 게 없는 나는 존 필리언에 대해서도 보도된 내용밖에는 모른다.
    지금 나는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라 우리들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우리 지역에는 나 말고도 잘 해나갈 유능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로 35년이 넘는 정치생활을 마감한 존 필리언에게서 신선한 뒷모습을 느꼈다. 특히 좋은 뒷모습을 보이기 어려운 정치판에서 후배에게 길을 터주고 훌훌 떠나는 그 모습이야말로 바로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얼마 전에 참석했던 어느 모임이 떠올랐다. 나이를 먹을 만큼씩 먹은 사람들이 이악스러운 모습으로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별것 아닌 것을 명예로, 권력으로 여기며 다투는 모습은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사십이면 불혹, 자신의 얼굴을 책임 진다는데, 그 나이를 훌쩍 넘긴 사람들의 아름답지 못한 민낯을 보는 일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오십 중반을 넘어설 무렵 불쑥 ‘여생(餘生)’이란 말이 나를 찾아왔다. 막막하고 두려웠다. 그 말을 내 삶에 들여놓고 한동안 골몰했었다. 그 후 어느 날인가부터 나이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늙기는 하되 낡지는 말자!”고 나 자신을 채근함과 동시에 주변의 동년배들에게도 곧잘 하는 말이 되었다.
    꽤 이른 시절부터 문학 활동을 해오면서 가끔 노욕과 노탐에 찌들어있는 선배들을 보아왔다. 그것이 더욱 서글프고 한심한 것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데 있다. 문사,文士가 아닌가. 그래서 실망도 컸고, 따라서 반면교사(反面敎師)도 되었다. 글을 쓴다고 다 문사가 아니라는 것도 절감했다.
    이제 내가 그 노년에 들고 보니 나이듦이 더욱 곡진하게 다가선다.



                                                                                          -한계령 풀꽃



              통통한 몸 만드는데 오십

              흰머리 만드는데 육십년

              손바닥 안에 고인 물 들여다보는데
              칠십년


    나의 시 [종심,從心] 전문이다.


    이 시는 솔직한 심정의 고백이며 지금까지 살아온 내 생애의 결산이다.
    떠나야 할 때를 알아서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것은 꼭 시구절만이 아니다. 새로운 기대로 맞이한 한해의 반을 후딱 보내버린 6월 내내, 흘려버린 시간을 되짚어가며 나머지 반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고 마음에 품고 있는 화두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나이 든다는 것은 지혜로움과 너그러움을 갖추는 일일 것이다. 주변을 배려하고, 배경이 되어 뒷사람을 받쳐주고, 주어진 것에 순응하는 일, 그것이 나잇값일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휘말려들지도 모를 욕심과 시기와 편견과.... 등의 불길을 잘 헤쳐 나가야 한다. 나잇값 하기가 쉬운 일만은 아니다. 떠나야할 때, 자리를 비워줘야 할 때를 분별하고 실행하는 일이 쉬울 수가 없다. 유쾌하지 않았던 얼마 전의 경험을 함께 한 많은 사람들의 기억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그러지는 말아야지. 편견과 고정관념에 갇히지는 말아야지. 존 필리언처럼 다른 사람에게 길을 터주는 일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나의 시 [종심,從心]으로 고백했듯이, 손바닥에 고인 물을 들여다보는데 칠십년이나 걸린 나로서는, 당장 남은 반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신중하게 조율하며, 나잇값을 제대로 할 수 있기를, 늙되 낡지는 말기를 다져보며 조심스럽다. 나이를 먹는 일은 저절로 되는 일이지만 나잇값을 해내는 것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나이가 부끄럽다. 거부할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작아지는 것 뿐이다. 작아지기 위하여 없는 지혜나마 모아서 비좁은 소견 속에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 아름다운 뒷모습을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으로 7월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