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스포츠맨십,잰틀맨십을 넘어 휴먼십으로

천마리학 2018. 4. 17. 07:46






스포츠맨십잰틀맨십을 넘어 휴먼십으로

 권  천  학


시인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권천학

 


마크롱의 가면을 쓰고 사법기구의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

 


늘 하는 대로, 오늘 아침에도 커피 한 잔을 내린 다음 신문을 펼쳐들었다. 대개는 이미 인터넷을 통하여 접한 것들이어서 대충 훑어나가다가 윤봉길 의사처럼 비장한 심정으로...라는 굵은 제목에서 눈길을 멈췄다 윤봉길 의사처럼...’이라니?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에서 한국휠체어 컬링팀인 오벤져스4강 진출을 놓고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강릉하키센터 경기장에서 정승원 선수가 성공시킨 드로우 샷(하우스 중앙에 스톤을 보내는 샷)으로 영국을 54로 꺾고 밴쿠버 대회 이후 8년 만에 준결승 진출을 확정됐고, 그 여세를 몰아 예선 1위를 달리던 중국을 76으로 꺾고, 막강팀 노르웨이와의 준결승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20년 전 산업재해로 하반신 마비가 된 정승원씨가 재활과 패럴림픽 최고령출전선수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 가능하다. 장애의 몸을 부려가며, 피 같은 땀을 흘리고 이를 악 물었을 그 고통의 과정을 투구할 때마다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질 때의 각오와 심정으로 던진다는 한 마디로 대변하고 있다. 운동경기장 특히 최고의 기량을 다투는 올림픽대회에서 가끔 펼쳐지는 인간드라마가 더욱 감동적인 것은 한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의지가 피워내는 스포츠맨쉽의 최종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간절했을까. 얼마나 비장했을까. 인간살이에서도 무슨 일을 하든 그런 자세로 임한다면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실패한다고 해도 그 실패는 성공의 다른 이름이 된다

 

이어진 또 다른 기사에서 또 한 번 감동했다.

최고의 몸 상태로 경기하지 못하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기권했다.

와, 멋장이!


캘리포니아주 인디언웰스에서 열리는 남자프로테니스월드투어(ATP)BNP파리바 오픈 8강에서 세계정상인 페더러와 두 번째 대결을 앞둔 정현선수가, 지난 1월 호주 오픈 준결승에서 맞붙은 페더러 선수와의 경기 도중 2세트에서 발바닥의 물집 때문에 기권한 것에 대하여 한 말이다. 한창 젊었을 적, 집 근처까지 찾아온 한 선배를 만나러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갔다가 무성의하다고 꼬집혔던 일이 떠올랐다. 그 선배는 미모에 상당히 자신이 있나봅니다하더니, 여자가 화장하지 않고 남자를 만나는 것은 그 남자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말하자면 자기를 배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하옇튼,



당시 세계랭킹 58위인 정현선수가 거기까지 간 것만으로도 우리 모두를 흥분시켰다. 그는 이미 세계정상급들과 3번의 대결을 치렀다. 조코비치(2016,호주오픈), 나달(201710월 파리 마스터스)과 지난1월의 페더러와의 대결이다. 그 전적만으로도 한국테니스의 위상을 급상승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의 세계랭킹도 26위로 올랐다. 단지 테니스의 기량만 좋은 것이 아니라 상대를 예우할 줄 아는 배려의 잰틀맨 쉽까지 갖추고 있다니, 감동이다. 다음 경기에서 비록 져도 인간으로는 이미 이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글을 정리하는 동안 정현은 페더러에게 02로 졌고 랭킹23위가 되었다.)


스포츠든 인간살이든 폭탄을 던질 때와 같은 비장한 노력과 상대를 배려하는 아량이 없으면 아무리 목적달성을 했더라도 결코 성공했다고도, 아름답다고도 하지 않는다.

배려는 인간성의 기본 양심이며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 즉 존중이기 때문이다. 내가 존중받고 싶으면 상대도 존중해야한다. 휴먼쉽이 배제된 달성은 결코 아름답지 않은 이유이고, 내가 인간성, 휴머니티를 굳이 휴먼쉽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우리는 종종, 1등으로 달리던 선수가 1등을 포기하고 함께 달리다가 쓰러진 선수를 부축하여 골인하는 감동어린 장면이나, 그와 비슷한 휴먼드라머를 만날 때마다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바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우리가 따뜻한 피와 체온을 지닌 인간임을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또 종종, 하찮은 감투나 명분 때문에 배려는 고사하고 눈에 뻔히 보이는 잘못까지도 요령을 부려 빠져나감으로서 주변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례를 본다. 그 알량한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부리는 얕은 수작은 명예가 곧 불명예임을, 명분이 곧 탐욕임을 왜 모르랴 그 사람만 모르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 사람 자신도 알 것이다. 모르는 척 할 뿐이다. 양심의 눈이 어두워서. 만약 모른다고 한다면 인간성이 나쁜 사람이거나 거짓말쟁이다.


평소 같으면 별로 관심 없이 지나치던 스포츠페이지에서 얻은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 선 두 선수의 스포츠맨쉽과 젠틀맨쉽은 커피맛을 싱겁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것을 뛰어넘은 휴먼쉽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주었다. 오늘 아침 신문읽기는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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