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딸, 씁쓸한 전설

천마리학 2017. 8. 15. 06:32




 

 

딸, 씁쓸한 전설   *   권   천   학



                                            도리나코스트라의 그림




미국의 세틀가 가문에서 무려 137년 만에 딸이 태어났다. 용감하게 살라는 기원을 담아 ‘카터’라는 남성적인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빠의 직장동료들이 도로 옆에 아기의 모습과 카터라는 이름을 커다랗게 넣어 만든 대형광고판을 세워 축하해주었다고 한다.

오늘 받은 그 기사 속의 방실방실한 아기의 얼굴과 이름이 커다랗게 적힌 광고판을 잠시 들여다보며 아기를 따라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동시에 나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혼잣말, 딸도 귀해봐야 한다니까! 이 혼잣말 속엔 표 내진 않았지만 딸이어서 차별받은 억울함이 배어있다. 반감도 은근히 서려있다. 그 반감에 대하여 이유가 있음을 우리 세대들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갈 것이다.


137년만이라면 50년을 한 세대로 잡는 일반적인 산법에 의하면 두 세대를 지나 3세대의 중간을 넘어서는 세월이다. 가임의 나이 상한을 30세로 친다면 4세대를 건너 5세대의 후반에 진입한 세월이기도 하다. 반가울 만하다. 그런데 만약 딸이 아니고 아들이었다면 어땠을까? 딸만 태어나는 가문에서 3대만에 혹은 5대만에 아들이 태어난다! 역시 경사였을 것이다.

 

만약 미국이 아니고 우리나라였다면?

아마 그 사이, 3대, 5대는 그만두고 당대에 가정이 몇 번 뒤집혔을 것이고, 몇 여자의 인생이 이어 파탄 났을 것이다.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부인이 쫓겨나거나, 부처님 가운데 토막도 돌아앉는다는 시앗을 두거나, 두 집 살림을 하거나... 딸들까지 밉살댕이가 되어서 구박받으며 숨죽여야 했을지 모른다. 같은 이유로 남편은 부인을 구박하고, 난봉꾼이 되어 외박을 당당하게 일삼고, 드러내놓고 이중생활을 하고... 아들 없는 것이 과연 부인만의 책임일까? 아니다. 불임의 원인이 어느 쪽에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분명히 반반의 책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그 동일한 이유가 부인에게만 덮씌워지는 올가미가 된다. 그 죄 아닌 죄를 옴싹 뒤집어 쓴 부인의 인생은 파탄 나고, 부인만이 아니라 딸들까지도 억울하게 살아야 한다. 남편은 절반의 책임의 있음에도 아들을 얻는다는 명분으로 온갖 만행을 저지른다. 사회도 그 만행을 용인하고 오히려 부추겼다. 오직 아들을 얻겠다고 일념으로 기울이는 그 필사적인 노력은 동물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미국의 세틀가처럼 2대건 3대건 그저 하늘의 뜻이려니 하고 묵묵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은 기대할 수 없다. 결코 아름답게 봐줄 수 없는 그 인권부재의 행위가 한 세대 전의 그리고 지금도 일각에서는 이어지고 있을지 모르는 우리의 뒷모습이다.

 

 

내 친구 중에 ‘복구’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다. ‘다시 복(復)’자에 ‘아홉 구(九)’자다. 바로 위 언니 그러니까 여덟 째 딸의 이름이 ‘끝 말(末)’자에 ‘아들 자(子), 말자였다. 실제로 있는 ’딸고만이‘라는 이름과 같다. 그런데 아홉 번째로 또 딸이 나왔으니 복구되었다는 의미였다. 復 자 대신 ‘복 복(福)’자 이었으면 오죽이나 좋았을까. 아들에 미쳐있었던 우리 전 세대의 부모들에게 딸은 값싼 물건이었고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다. 아홉 번째 물건일망정 부모로서의 정을 담아 복(福)이 있기를 빌어주었더라면 그 정성이 가상해서라도 삼신할매가 그 다음동생으로 아들을 점지해주었을지 모를 일이다. 삼신 할매도 여자 아닌가. 동정심을 충분히 발휘했음직 하다. 그런데 다시 복구된 아홉 번째 물건이라니. 다시 딸을 낳아 열 명을 채웠다. 동정의 여지가 없었다. 福을 빌어주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다. 아니면 삼신할매 조차도 여자여서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그 마음을 삼신할매가 모를 리 없다. 삼신 할배가 존재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력 좋은 내 친구의 부모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들을 기다리며 굳세게 정진했다. 그 덕에 두 개의 값싼 물건을 더 얻었다. 결국 ‘딸 한 타스 집안’이 되었다. 그제야 아들에 대한 염원을 접고 백기를 들었다. 그 후로는 또 딸이 생길까봐서 합방까지 조심했다는, 딸에 대한 씁쓸한 전설,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전설 같은 실제 이야기다.

 

이제 그런 전설은 사라져가고 있다. 훈훈한 이웃동네 이야기가 잠시 사라져가는 서글픈 전설을 들추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어머니가 될 딸들이여! 그리고 이미 어머니가 된 예전의 딸들이여!

자랑스러운 여성으로서 더욱 당당하게 아름답기를 다짐하며 축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