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연후然後에

천마리학 2018. 3. 23. 00:47





연후然後

시인, 국제PEN 한국본부 이사 권천학

 

 

아버지 돌아가신 지 달포가 되었다. 그동안 형언할 수는 없는 증상으로 힘들게 보내고 있다. 아픈 것도 아니고 안 아픈 것도 아닌 묘한 상태...

추모공원에서 아버지를 받아 안는 순간, 뜻밖의 경험을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표현하기 어려운 두께의 슬픔으로 자지러질 것 같았던 감정이 사라지고, 갑자기 해맑은 기운이 온 몸을 휩싸면서 환하게 쏟아지는 한 줄기 햇살, 그 햇살 속에서 느껴지는 무중력, ‘깨끗하게 돌아오셨네, 아버지~’ 나도 모르게 입속에서 아버지를 불렀다. 그 순간의 기분을 그대로 옮겼다.

 

아버지가 깨끗하게 돌아오셨다

몸에 붙어있던 온갖 잡다한 티끌과 세균들,

생애를 더디게 했던 갖가지 더러움들을

몽땅 태워버리고

가뿐하게,

빨강, 파랑, 노랑... 세상의 잡다한 색들을 벗어버리고

더 이상 범접할 수 없는 무채색의 혼으로

우주 삼라만상의 기운으로 가득 차서

깨끗하게 돌아오셨다

 

-졸시 <아버지 돌아오시다>

 



시간이 갈수록 몸도 마음도 보이지 않게 부대끼기 시작했다.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도 같고 허공에 둥둥 뜬 것도 같았다. 돌아가시기 전에, 돌아가시면 차디찬 땅속에 아버지를 묻고 어떻게 사나, 못 견디게 가슴 에이던 나는 어디로 갔는지, 그저 아무 생각도 감정도 없는 냥, 무덤덤, 그런데 힘들었다. 의욕도 없고 기력도 없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먹고 싶은 게 뭐냐? 하고 싶은 게 뭐냐? 살펴가면서 신경써주는 가족들에게 고작 하는 대답이 말 걸자 마!’였다. 매사 귀찮고 그냥...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텅 빈 껍질 같았다. 있다면 한 가지 감정, 여전히 때 되면 먹고 때 되면 자는 나 자신이 괘씸했다. 나 자신에게 느끼는 일종의 분노였다. 


그러는 중에 수시로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의 말투, 몸짓, 웃으시던 모습... 예기치 않게 그야말로 불쑥불쑥이었다. ‘요즘도 그렇게 바쁘냐? 전화도 없으니...’ 우두커니 창밖을 보고있다가 전화기를 바라본다. ‘, 안주 생겼다. 한잔 하게 어서 오너라하시던 전화목소리가 생생하다. ‘술부터 한 잔 한 연후에 밥 먹자’, 현관에 섰을 땐 발을 더 집어넣은 연후에 구두주걱을 써야지.’ ‘전화를 한 연후에 만나도록 해라’... 흔히들 쓰는 후에’ ‘나중에라는 말 대신 아버지는 연후에란 말을 자주 이용하셨지, 하는 생각에 미쳤다.


생각을 한 연후에 말을 해야지하고 나무라기도 하셨고, ‘네가 돌아간 연후에 그것을 발견했다든가, ‘일본으로 떠난 연후에야 할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밥부터 먹은 연후에 이야기를 해라’ ‘부모가 된 연후에야 부모마음을 알게 되더라등등. 그런 말씀을 하시던 장면속의 모습까지 떠오르면서 새삼스러워졌다. 사람은 겪어본 연후라야 알 수 있고, 시간이 지난 연후에야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며 반성할 수 있고, 일을 당해본 연후라야 상대방의 처지를 알 수 있는 법이라면서 연후지사(然後之事)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실행한 연후에 주장하고, 두드려 본 연후에 건너야하고...그것이 세상살이라고도 하셨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엔 젊어 일본에서 살 때 월급을 모아서 한국으로 보냈는데 당신 어머니(나의 할머니)에게 안보내고 큰어머니(할머니의 큰동서)에게 보내어서 그 돈으로 전답을 장만하도록 도왔는데, 나중에 귀국해보니 큰집 살림이 크게 펴진 것도 같지 않아 허망했다고, 그때는 종갓집부터 일으켜 세워야한다는 마음에서 그랬었는데, 당신 어머니께서 서운해 하셨던 일이 생각난다고, 나 고등학생 때 베드민턴 대표선수로 뽑혀 합숙훈련 들어간다고 했을 때, 딸이라서 안 보낸 일도 꺼내시고는 지금 같으면 보냈을 텐데.... 지난 세월에 잘못한 게 너무 많다 하시기도 했다.


내가 시 <전설>로 전국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날, 저녁 밥상 앞에서 술을 한 잔 따라주시며, 신문에 발표된 그 시를 보고 나도 너의 팬이 되었다고 하시더니 술도 익은 연후에 향이 나고, 글도 삶이 잘 익은 연후에 좋은 글이 나온다고 하셨다. 이어서 중국의 문인이며 남종화의 거두였던 陳繼儒(진계유)의 이야기를 하셨다.


연후에, 然後... 그래요 아버지. 모든 것은 연후에. 그런데 아버지, 잘못하셨어요. 저 아직도 철이 덜 들었는데, 아버지께 잘 해드리지도 못했는데, 좋은 글도 못쓰고 있는데... 제가 철이 든 연후에, 잘 해드린 연후에, 좋은 글 쓰는 것을 보신 연후에... 그때 떠나셔도 되잖아요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