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설날을 考察하다 <1> 설에 얽힌 역사 * 權 千 鶴

천마리학 2021. 3. 19. 09:17

시니어 칼럼 2월호 

설날을 考察하다 <1> 설에 얽힌 역사 * 權 千 鶴

시인  국제 PEN 한국본부 이사

 

 

 

 

 

음력설을 맞이하고 보내면서 설에 얽힌 역사를 고찰(考察)해본다.

이제 나이도 들만큼 들었고, 또 멀리까지 와서 뿌리내리기를 하며 살고 있는 교민들에게는 설렘과 기대감으로 들떴던 설날의 추억조차도 흐릿해져서 추억으로부터 너무 멀리, 어린 시절로부터 너무 멀리, 부모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일가친척,친구들로부터... 너무 멀리 와버린 느낌이 들것 같아서다.

먼 설을 맞이하여 옛 기억과 함께 설에 얽힌 흔적들을 소환해보기로 한다.

멋모르던 어린 시절, 홑바지 홑저고리 안에서 추위를 견디느라 오그라들던 몸뚱이의 감각을 되살려보면, 어쩌다 물 묻은 손으로 만지면 쩍쩍 얼어붙던 문고리 생각도 나고, 새로 산 신발을 아끼느라 선반에 올려두었던 일도 생각난다.

 

 

전통적으로 음력을 이용해온 우리나라가 언제부터인가 양력이 강세가 되었고, 신정(新正)이라는 명칭이 생기면서 그 이전까지 우리가 쇠어왔던 설을 구정(舊正)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신정을 서양식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쉽게 넘길 수 있지만, 한자(漢字)의 의미를 따져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신정(新正)은 새것, 새로운 시작이라는 뜻인데 비하여 구정(舊正)은 옛날 것, 낡은 새해, 구식 정월이란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왜 굳이 신정 구정으로 명명했는지, 못마땅하다. 그럴 듯한 대안도 없이 받아들이고 그렇게 흘러갔으니, 낡은 것이 아니라 오래된 우리의 전통이란 뜻을 덮씌워 해석하며 애써 아쉬운 구석을 메꿀 수밖에 없지만 여전히 얄궂게 느껴진다. 그래서 따져본다. 언제부터 그런 이름이 되었을까.

 

 

신정(新正)과 구정(舊正)에 대하여.

한자(漢字)문화권인 한국 일본 중국에 서양문물이 들이닥친 때가 19세기 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일본이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체제가 1868년에 새로운 근대국가를 출범시키고 있는 터여서 과감하게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그동안 이용해온 음력을 양력 즉 서력기원인 서기(西紀)로 바꾸었다. 태음력(太陰曆)은 우리가 말하는 음력으로 달의 운행을 기준삼은 것이고, 태양력(太陽曆)은 양력으로, 해의 운행을 기준 삼은 그레고리력이다.

일본의 지배를 받던 우리나라는 강제로 일본식을 따랐다. 일본은 자신들의 양력설을 신정(新正)이라고 하고, 우리나라의 음력설을 구정(舊正)으로 규명 지었다.

1896, 을미개혁 때 고종은 일본의 태양력을 사용한다는 칙령을 발표하면서 음력설의 자리를 양력설에 내준 꼴이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신정을 쇠면서도 눈치껏 구정을 버리지 못했다.

독립이 된 이후에도 신정과 구정을 공존해서 결국은 설을 두 번 쇠는 이중과세(二重過歲)가 되었다.

독립에 이어 한국전쟁의 후유증으로 단단한 국력과 빈곤타파가 시급했던 이승만 정부에서 박정희 정부에 이르자 가난 탈피와 자립경제라는 국가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고 비합리적인 생활을 개선을 주창하였다. 사회적 폐단인 허례허식(虛禮虛飾)을 없애자는 국민적 운동이 벌어졌다. 그 일환으로 양력설로 통합하도록 했고, 일부 계층에서는 양력설을 쇠는 경향이 생겼다. 그 과정에서도 음력설에 차례를 지내는 전통이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면서 엉거주춤 자리를 잡지 못한 채 흐르다가,

1985~1988년까지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음력 1 1일 하루를 공휴일로 지정했고.

1989년에 음력설을 '설날'로 하고, 섣달그믐(음력 12월 말일)부터 음력 1 2일까지 3일 간을 국가공휴일로 지정하여 고속도로 위의 귀향행렬을 만들어내었다.

 

 

’, ‘설날의 기원과 의미

의 어원은 새해,  낯설다의 어근(語根) 설다에서 유래. 설다는 옛말 섦다에서 나온 새롭다의 의미의 옛말.

, 선날 먼저 자를 써서 선날 설날로 변했다. ‘선날은 일년 365일중 가장 앞선 날이라는 뜻이다.

개시(開始)라는 뜻의 선다도 된다. 예를 들면 우리말의 장이 선다와 같다.

옛말 섧다에서 나온 말. ‘근신하다라는 뜻.

 

설날을 한자로는 신일(愼日)이라고 해서 매사에 근신하며 경거망동을 삼가는 날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원단(元旦) 또는 원일(元日)이라고 하는데 모두 정월 초하룻날이라는 뜻.

세수(歲首) 또는 연수(年首)하고도 하는데, 이것 역시 한 해의 첫 달이라는 뜻.

단월(端月, 정월(正月)이라고도 하며 한 해의 첫 달이라는 뜻.

부르는 말은 달라도 뜻은 다 같이 신중을 기하고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일 년이 시작되는 첫날이니 당연히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새로운 각오로 시작해야한다.

1월을 각별히 정월(正月)로 칭하는 것도 그런 특별함에 있다.

 

 

문헌상의 기록

삼국사기에 서기 488년 신라 비처왕 때 설날을 쇠었다는 기록이 있고, 261년 백제에서 설맞이 행사를 한 기록이 있고, 651년 신라에서 정월 초하룻날 왕이 신하들과 새해아침에 축하잔치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백제 고이왕, 책계왕 들이 정월에 제사를 지낸 기록도 있고 고려시대에는 설날을 삼짇날, 팔관회, 한식, 단오, 추석, 중고, 동지 등과 함께 9대 명절로 쳤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한식, 단오, 추석과 함께 4대 명절로 정해졌다.

 

 

 

 

 

 

까치설에 대하여

섣달 그믐날을 작은설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작다는 뜻의 옛말 아츤을 따서 아츤설이라 했고, 이것이 아치설로 되었다가 다시 까치설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음운변화를 일으킨 것이라는 추론이 학계의 보편적 주장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섣달 그믐날을 까치설로 정한 설화가 있다.

신라 소지왕 때 왕비와 한 승려가 내통하여 왕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는데, 어느 날, 갑자기 쥐, 돼지, 호랑이, 용 등이 소란스럽게 울어대었다. 이상하게 여긴 왕이 살펴본 결과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간파하게 되었고, 이때 동물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되었음을 고맙게 생각한 왕은, 자기를 도와준 다른 동물들은 다 십이지에 채택되어 있는데 까치만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서 섣달그믐날을 까치의 날로 정했다는 내용이다. (설화는 한 가지로만 규정되어있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다음 기회에 구체적인 이야기를 다루어 볼 예정이다.)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깨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이 노래는 윤극영이 1927, 일제강점기에 만든 것인데 대개는 까치설과 연관 있는 것으로 짐작하기 쉬우나 까치와는 전혀 무관하다. 일본에 의하여 양력설을 쇠는 것에 대한 반발로 일본 설을 작은설로 표현하고 그와 대비해서 우리의 음력설이 설날 큰설이라는 저항의 표현이라고 학계가 밝히고 있다.

 

까치와 관련하여 일본에 까치가 전래된 이야기를 덧붙인다.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일본에 까치가 유입되어, 지금은 전국적으로 퍼져있는데, 특히 큐슈 홋가이도 지역에 많다고 한다. 까마귀와 함께 길조로 여기며, 지역에 따라서는 보호종으로 보호하기도 한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반도를 공략하던 사가성의 영주인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이끄는 부대가 우리나라의 남부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에 영내로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까치까치 하고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가 일본말의 승리’ ‘이겨라!’(! !) 라는 말의 발음과 비슷하여, 그 새를 잡아서 승리의 새 라는 의미를 붙이고, 일본으로 가져가서 자신의 영지인 큐슈의 사가현에 풀어놓았다. 그 후로 까치가 번식하여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사가현의 현조(현을 상징하는 새)로 지정했다고 한다.

 

 

설날의 세시풍속

설날이나 정월에는 여러 가지 풍속들이 있다.

차례(茶禮), 세배(歲拜), 설빔, 덕담(德談), 세찬(歲饌), 세주((), 문안비(問安婢) 보내기, 연날리기, 복조리걸기, 야광귀 쫒기, 청참(聽讖), 윷놀이 널뛰기, 머리카락 태우기... 등이 있는데 다음호에 설명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