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그때 그 자리, 거기에!-역사는흐른다

천마리학 2019. 10. 16. 21:38



한국일보

https://www.koreatimes.net/ArticleViewer/Article/122371



그때 그 자리, 거기에!

역사는 흐른다


  • 23 Sep 2019

권천학 (국제PEN클럽한국본부 이사)


6역사는흐른다.jpg

뉴스는 브론스윅의 내항에서 기울어진 골든레이호의 마지막 선원 4명을 구조했다는 낭보를 전해왔다. 기관실에 고립된 4명, 모두 한국인이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구조되기를 기도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떠오른 것은 지난 5월에 다뉴브강에서 일어난 헝가리 유람선 침몰사건이었다. 그때도 33명의 생환을 간구하며 애꿎은 다뉴브강만 나무라고 있었다. 다뉴브! 너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 거야!


다뉴브강이 맨 처음 나에게 다가온 것은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왈츠로부터였다. 짠짠짠 짜잔~ 짜잔~ 짜잔~ 콧노래로 박자를 맞추며, 녹색의 융단으로 깔린 클로버밭, 하얀 꽃양탄자 위를 맨발로 즈려밟으며 월츠를 추던 그 시절, 가슴에 품은 것은 이상하게도 슈만과 클라라였다.


저녁나절이면 자전거를 타고 그 강둑길을 지나 집으로 가는 소녀 클라라, 강둑길 산책을 즐기던 심약한 소년 슈만. 어느 해질녘 클라라의 자전거가 넘어지고 바구니에서 과일이 쏟아진다. 쏟아진 과일을 주워 담아 주다가 마주친 눈길에 볼이 붉어지고 그 순간 사랑에 빠진 소년, 고백하지 못한 채 흐르는 강물에 앓는 가슴을 풀어내곤 한다. 어느 봄날, 강둑을 휘덮은 클로버 꽃을 보며 반짝 떠오른 생각, 화관을 만들어 아직 이름도 묻지 못한 소녀의 머리에 씌어주면서 사랑을 고백하리라. 이른 아침부터 강둑에 나가 이슬 젖은 꽃을 따고 정성들여 화관을 엮는다. 해질녘 저만큼 자전거를 탄 클라라가 나타난다. 두근두근, 가슴의 방망이질이 빨라진다. 가까워질수록 숨이 멎는 듯, 말문은 떨어지지 않고, 심장은 쿵쾅쿵쾅, 내려 깐 눈길은 구르는 바퀴에 감겨버린다. 무심히 지나쳐 길게 그늘 드리운 백양나무들 사이로 멀어져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만 볼뿐. 멀리, 휘어진 강둑길로 사라지자 와르르 쏟아지는 눈물. 수줍게 들고 있던 클로버 화관을 강물에 던져버린다. 해질녘 다뉴브강물의 오색 물무늬 위로 물맴을 돌며 떠내려가는 화관. 그의 뺨 위에 흐르는 눈물에 노을빛이 섞인다.
물론 이것은 소녀시절의 내가 상상력으로 빚어낸 장면이다.


다뉴브강이 두 번째로 다가온 것은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이었다. 은비늘 같은 반짝거림으로 시작된 첼로의 선율은 마침내 강바닥을 긁어내리는 묵직함으로 잠겨들었다. 섬세하고 변화무쌍한 바이올린 음색보다는 인생의 깊은 맛을 우려내는 첼로의 음색을 미처 모르던 시절이었다. 다뉴브강은 사뭇 낭만적인 모습으로 그렇게 나에게 왔다.


다뉴브와의 세 번째의 만남은 밀레니엄이 시작되던 해, 슬로베니아에서 열린 국제펜클럽 세계대회에 참석할 때였다. 늦었지만 실제로는 첫 만남이었다. 체코, 헝가리, 오스트리아 등 인근의 나라들을 둘러보았다. 그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유람선에 올라 왈츠의 다뉴브 강물 위를 흐르고 있었다. 그 물결 어디쯤, 강물에 뿌리를 박고 떠있는 듯한 하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드레스 자락을 물결에 적시고 있는 듯 아름다웠다. 헝가리 국회의사당이었다. 그 장면도 추억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다뉴브강에서 느닷없는 비보(悲報)가 날아왔다. 허블레니아 유람선 사고였다. ‘중요한 건 속도다. 구조 활동에 총력을 다 하라...’ 사고소식이 보고된 지 4시간이 지나서야 소집된 관계부처대책회의에서 대통령이 지시를 내렸다는 뉴스를 듣는 순간, 치솟는 답답함. 당장 헝가리 정부에게 직통전화를 해서 우리 국민들 빨리 살려내라, 고함이라도 쳐야하지 않을까, 속이 터졌다. 헝가리가 어디 이웃동네인가, 화를 내며 동동거리는 중에 그때의 넘실대던 다뉴브의 물결이 파노라마로 스쳐지나갔다. 혹시? 여러 각도로 사고현장을 보여주는 속보를 지켜보는데, 아, 그 하얀 건물, 국회의사당! 그 때, 그 자리, 거기! 내가 있었던 그 유람선!


허블레니아는 벌써 잊혀져가고 있다. 골든레이호도 우리는 곧 잊을 것이다. 그렇다. 역사는 흐른다! 흐름은 슬프면서 아름다운 질서. 아픈 기억도 먹먹하던 슬픔도 유유한 강물에 띄운 채. 바다처럼 출렁이며. 유장(悠長)한 역사의 흐름에 얹혀 흘러간다. 우리는 모두 강바닥에 가라앉은 모래 한 알이거나 떴다지는 물무늬 하나쯤으로. 그나마 귀 밝은 이는 출렁이는 물결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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