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2020 신춘문예심사평 함께 더 공부하자!

천마리학 2020. 1. 30. 04:07




함께, 공부 더 하자!

2020년 신춘문예 심사를 하고 나서



  • 캐나다 한국일보 (editor@koreatimes.net) --
  •  
  • 24 Jan 2020

권천학 (시인·국제 PEN 한국본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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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교민으로서, 문학인으로서의 나의 소망은 교민사회가 더욱 문학적이기를 바란다. ‘문학적이라고 하면 문학을 전공하거나 문학적 소양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전혀 그런 뜻으로가 아니라, 이해하기 쉽게 하려는 의도로 다소 문학외적인 의미로 문학적이란 단어를 차용(借用)한다.


문학적이란 거짓이 없고, 다툼이 없고, 이해가 깊다는 의미다.

 

거짓이 없다함은, 

글쓰기는 속마음, 속뜻을 나타내는 행위이므로 속이거나 위장하여 쓴 글은 참글이라고 할 수 없다. 문학은 양심과 인간의 본성에 닿아있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부터 선비 또는 문인이라는 명칭을 가진 사람들을 다르게 예우해주었다. 글은 곧 글을 쓴 그 사람 자체이다. 가끔 주변에서 글과 그 글을 쓴 사람의 실제와는 너무나 달라서 실망한다는 말을 듣게 되는데, 그게 바로 위선으로 치장했거나, 거짓으로 쓰기 때문이다. 글 특히 시에 있어서 거짓이 사용될 때는 참()을 더 진하게, 강하게 말하고자 할 때이다.

 

다툼이 없다함은, 

글은 문자를 통한 표현이므로 소리를 내지 않는다. 소리는 때로 소음이 되고 불협화음이 되어 다툼의 소지가 된다. 글이 소리로 나타날 때까지는 숙고(熟考)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소리 없는 소리가 더 큰소리라는 것, 바로 그것이 글의 힘이라는 것을 알자.

 

이해가 깊다함은, 

그릇의 용량을 말한다. 글은 그 사람의 그릇에 담긴 만큼 쓸 수 있다. 즉 그 사람의 됨됨이와 함께 학문과 지혜의 깊이만큼 쓸 수 있다는 의미이다. 상식적이거나 드러난 정보들은 많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것은 신문기사이지 문학이 아니다. 문학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그 정보의 이면(裏面)을 들여다보고 깊은 이해와 사유(思惟)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깊이 들여다보면 사유가 따르고, 사유가 따르면 배려심이 생기고, 사람을 알게 되고, 비로소 세상을 터득하게 된다. 문학의 목적은 곧 인간탐구이다.

이런 설명을 하려고 문학적이란 말을 문학외적으로 차용하였다.

 

함께, , 공부하자!

2020년도의 신춘문예 심사평을 하기 전에 먼저 던지는 말이다. 이 말은 응모자들만이 아니라 이미 시인인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두루 각성하자는 의미로 내 거는 말이다.

 

이번 심사에서 시 15편과 시조 5, 20편을 검토했다. 한 사람도 채택하지 못했다. 매우 아쉽다. 채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심사소감을 말하지 않으면 응모자들은 제대로 응모가 되었는지부터 궁금할 것이고, 또한 이 평을 통하여 한 가지라도 얻는 것이 있게 하기 위해서 밝힌다.

응모자들 모두가 시심(詩心)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반갑다고 할 수 없었다. 반가움 보다는 아쉬움이 더 컸기 때문이다. 단순히 감성이나 욕구만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는 점, 깊이 볼 수 있는 안목과 성찰, 숙고(熟考)할 수 있는 지력(知力)이 필요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아무리 문자를 이용하여 표현하는 것이 문학이고 시라고 해도 말하고자 하려는 내용이 없으면 알갱이 없는 문장, 즉 수다이거나 혼잣말에 불과하다. 시제(詩題)가 잡혔다 하더라도 그 시제를 어떻게 매만져서 어떤 모양새로 빚어낼 것인가를 연마해야한다. 매만지는 손길에 따라 구슬도 되고 구름도 된다.

 

긴 이야기는 다른 기회에 하기로 하고,

이번 응모작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하자면 첫째, 주제가 없거나 불분명하다. 둘째, 왜 쓰는지 이유가 보이지 않는다. <석양> <주술> <장승배기> <반디의 사랑> <풍선 따라> <동트기> <살다가> <파란 하늘> <여름 풍속도> , 대동소이하다. 어쩌다 눈에 띄는 구절(句節)이 있었지만 이어내거나 살려내지 못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삶은문장이되지못한다’, ‘세상은 분노 중입니다의 경우이다. <> <종이새>는 주제가 잡힐 듯하다가 맥이 끊어져버렸다. <나성(羅城)에는 누가 사는가>는 나성교회 예배당에서 시작해서 신라인까지 잇는 발상을 높이 산다. 그런대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동그란오후><나이아가라 폭포에서>는 군더더기를 떼어내고 줄기를 세우면 완성 될 듯하다. 붙여쓰기로 일관한 분이 있는데 매우 위험하다. 시에 있어서 붙여쓰기를 할 경우 그만한 이유가 보일 때에 비로소 시적장치가 된다. 그런 타당성 없이 붙여쓰기만을 하면 오히려 띄어쓰기에 자신이 없음을 무마하려는 것이거나, 겉멋으로 오해받기 쉽다.


시조를 응모하신 분이 있어서, 마침 시조의 세계화를 시도해나가고 있는 나로서는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직은 미흡하여서 시조의 기본 형식부터 다질 필요가 있다. 기본 틀부터 정확히 습득하면 금방 다다를 수 있음을 조언한다. 그 기반 위에서 정격시조 쓰기를 권장한다. 그동안 시조강의를 하면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어서 꼭 하고 싶은 말이다. 부디 멈추지 말고 꾸준히 단련하시기를 권한다.

 

시든 시조든, ()을 미루고, 공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한두 해 더 고생하더라도 달구어진 쇳덩이가 무두질과 연마로 모양새 잡아갈 수 있게 하고 싶은 욕심에서다. ‘이미 시인들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기본부터 다시 다지는 공부를 하고나면 틀림없이 무두질 잘 된 작품으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는다.


새해, 모두들 더욱 정진하시기를 기대하며, 마친다.

함께, , 공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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