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세상에 대한 보답

천마리학 2019. 11. 2. 07:23





세상에 대한 보답

권천학(국제PEN클럽한국본부 이사)



  • 29 Oct 2019 한국일보


헌혈.jpg


가진 것들을 익혀서 되돌려주는 착한 계절, 가을이다. 나는 무엇을 되돌려줄 수 있을까, 곰곰 뒤적이는 중에, 1173번째로 마지막 헌혈을 한 사람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헌혈! 말만 들어도 시큰거린다. 좋은 일 해 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가 실패한 오래 전의 헌혈 역사 때문이다. 종로나 영등포 로터리 등의 길가에 헌혈차가 자주 눈에 띄던 시절이었다. 용기를 내어 다가가서 헌혈 의사를 밝히면 매우 반겼다. 간호사의 인도로 차안으로 들어가 헌혈침대에 누우면 팔에 고무줄을 묶고 여기저기 두드리며 혈관을 돋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팔에서 혈관을 쉽게 찾아내지 못했다. 바늘 자국만 내고 그냥 내려왔다.


첫 번째 헌혈의지는 실패, 결국 팔뚝 여기저기에 시퍼런 멍만 남겼다. 그래도 헌혈차만 발견하면 다가가 헌혈을 시도했다. 또 실패, 그리고 멍, 또 실패 그리고 또 멍... 매번 멍이 사라지기까지는 여러 날이 걸렸다. 겨울엔 상관없었지만 여름에도 긴팔을 입어야 했다. 내 혈관이 왜 이상할까? 의심 반, 걱정 반의 마음이면서도 기어코 좋은 일 해보겠다는 의지는 다져져 헌혈차만 보면 다가갔다. 생고무 줄로 묶은 팔에서 혈관을 찾지 못하면 손등으로, 양팔을 이리저리 찔러대고, 양쪽 발등까지 여기저기 찔러대었지만 실패만 거듭, 그때마다 내 혈관이 깊이 묻혀있다거나, 약 하다거나 하는 것이 간호사들로부터 듣는 소리였다. 때로는 실패를 미안해하며 헌혈 후 주는 비스켓 두 개를 그냥 주기도 했다. 실패를 거듭하는 사이에 내 혈관이 깊이 묻혔거나 약한 것이 아니라 간호사들의 채혈솜씨가 서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고, 주사솜씨 좋은 간호사를 만나서 내 혈관의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싶어서라도 헌혈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한번은 실패한 헌혈차에서 내려와 걷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스치듯, 저기요! 민망한 듯 귀띔을 하고 재빨리 지나갔다. 살펴보니 나의 미색 원피스의 뒤편 어딘가에 피가 묻어있었다.
주사자리에 댄 탈지면 사이로 피가 접혀진 팔꿈치를 타고 옷에 묻어있었다. 생리혈로 짐작하고 민망해했던 모양이다. 근처의 공중화장실을 찾아 급하게 처치하긴 했지만 그 여름도 내내 긴팔 옷을 입어야 했다. 헌혈시도를 계속했지만 또다시 실패 거듭. 좋은 일도 팔자에 있어야겠구나! 언젠가부터 헌혈차를 발견하면 입맛만 다시며 멀리 돌아서가고, 헌혈에 대한 관심도 희미해졌다.
한참 후, 펄펄 끓고 있는 커피폿의 물이 쏟아져 무릎에서부터 발등까지 심하게 화상을 입는 사고를 당하고 의사인 동생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 병원의 간호사들도 혈관을 못 찾아 쩔쩔매다가 결국 원장인 동생이 직접 주사기를 들었다. 동생은 누나라서 긴장된다고 말하면서 집중하더니 가볍게, 단번에 성공했다. 그때부터 동생은 나에게 혈관주사를 가장 잘 놓는 의사가 되었고, 동시에 나의 혈관이 가늘고 좀 깊이 묻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참, 세월이 흘렀다.


명동입구에서 헌혈차를 발견했다. 오랫동안 포기했던 헌혈 욕구가 슬며시 솟았다. 솜씨 좋은 간호사를 만날지 모른다는 호기심도 발동해서 헌혈차로 다가갔다. 나이를 물었다. 오십이 넘어서 안 된다고 했다. 맙소사. 이젠 나이가 문제구나, 좋은 일도 팔자에 있다니까! 하며 돌아섰다.


제임스 크리스토퍼 해리슨은 열네 살 때 폐의 3분의 1을 잘라내는 수술에서 13리터나 되는 대량의 수혈로 목숨을 건졌다. 그 보답으로 18세 때부터 시작한 헌혈은 81세가 되어 1,173번째로 마지막 헌혈을 했다. 81세까지만 헌혈할 수 있는 호주의 법규 때문이었다. 그의 헌혈로 '안티-D' 백신을 만들었고, 240만 명이 생명을 구했다. 2011년엔 1,000회 헌혈로 기네스북에 올랐고, ‘황금팔을 가진 사나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좋은 일 하라는 팔자를 타고났구나! 하는 부러움 섞인 생각과 함께 오래 전 헌혈 실패 기억이 떠오르며 이어지는 한 생각.


세상에 대한 보답의 방법과,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할 수 있는 기회는 헌혈 외에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 가시에 찔리지 않고는 장미꽃은 모을 수 없음을 안다. 나의 헌혈실패 추억이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을 하지 못하거나, 주어진 삶의 고마움과 세상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는 비루한 변명이 되지 않기를 나 자신에게 곰곰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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