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늦여름의 전설

천마리학 2019. 10. 9. 18:13


https://www.koreatimes.net/ArticleViewer/Article/122807



늦여름의 전설   *   

권천학 (국제PEN클럽한국본부 이사)

 

08 Oct 2019


6봉숭아꽃물_02.jpg



봉숭아꽃물 들인지가 달포가량 되자 꽃물들인 손톱위에 반달이 떴다. 여름이 지고 있다는 표시다.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반달에서 달빛 버무려진 가야금소리가 들린다. 이슬에 젖어 마음도 젖는다.

무너진 사직, 국권을 빼앗긴 나라의 왕을 비롯하여 타국으로 끌려온 백성들, 부모형제가 그립고 고향이 그립다. 그립고 그리워서 고향마을의 개 짖는 소리까지도 그리운 사람들.

 

왕은 잠자리가 수상했다. 보일 듯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가야금을 타는 저 처녀, 손가락에서 피가 듣는구나, 아, 저런! 꿈이었다. 아침이 되자 시녀들을 모았다. 한 처녀의 손가락이 헝겊으로 매어있다. 너로구나! 어찌된 일이냐? 고향이 하도 그리워서 가야금을 타다보니 손가락이... 이름이 무엇이냐. 고려에서 끌려온 봉선(鳳仙)이라 하옵니다. 하도 그리워서, 하도 그리워서... 그렇구나, 무너진 사직에 가슴 아픈 건 왕이건 백성이건 다 같은 것. 타국에 인질로 끌려와 애타는 세월을 보내는 건 나만이 아니었구나! 왕이시여! 제가 가야금 한 곡조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려무나. 처녀는 헝겊을 풀고 가야금을 타기 시작한다. 왕이시여 어서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시옵소서~ 기원하는 곡이었다. 타고 또 타느라 손가락 끝에 피가 맺혀도 멈춰지지 않는 속울음이었다. 왕과 처녀는 함께 속울음을 울었다. 아서라, 그만 멈춰라, 마음이 아프구나. 왕은 처녀의 손가락을 헝겊으로 고이 매어준다. 꼭 돌아가리라! 함께 돌아가자! ... ... 드디어 왕은 고국으로 돌아와 충선왕이 되었다. 그 처녀를 찾았다. 처녀는 이미 병을 얻어 거처를 저세상으로 옮긴 뒤였다. 무덤위에 자라난 한포기 봉선화로 왕을 맞았다. 손을 대자 톡 터졌다. 오, 여리고 여린 여인, 너로구나. 왕은 여인들에게 봉선화 꽃물을 들이도록 하여 봉선이를 기렸다.

 

올림프스 산에서 신들의 파티가 열렸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신들을 대접할 황금사과 한 개가 없어진걸 알았다. 지체 낮은 한 여신이 도둑으로 지목되었다. 짓궂은 한 남신의 장난이었건만 여신의 결백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고, 조롱을 받으며 올림프스에서 쫓겨났다. 도둑누명이 억울한 여신은 끝내 속병을 얻어 죽고 만다. 그 무덤에서 돋아난 한포기 풀, 바람결에도, 누군가의 손길만 닿아도 껍질을 터트려 속을 드러내 보이며 외친다. 난 아니예요, 결코 난 도둑이 아니예요~

 

일제강점기, 암울한 조선백성들, 일본유학 중인 작곡가 홍난파와 옆집에 살던 김형준 그리고 쏘프라노 김천애. 난파와 형준은 뜨락에 핀 봉선화를 보며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 심경을 난파는 그가 펴낸 단편집 서두에 ‘애수’라는 제목의 곡조를 실었고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형준은 그 곡조에 맞춰 가사를 짓고 ‘봉선화’라는 제목을 붙였다. 김천애는 일본의 신인음악회에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출연하여 노래를 불렀고, 앵콜을 받는다. 앵콜송으로 ‘봉선화’를 부른다. 청중들 특히 교민들의 가슴을 흔들어 눈물바다를 이룬다. 그 노래를 부른 죄로 3개월간 감옥살이도 한다. 3절의 가사 때문이었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회생키를 바라노라.

 

성요셉병원의 응급실에 입원했을 때 회진 온 의사 중 한 사람이 꽃물 들인 내 손톱을 보고 말을 걸어왔다. ‘garden balsam(봉숭아꽃)’이라고, 천연꽃물이라고, It is not harmful to human body... 라고 이야기를 잇다가 Don't touch me! 라고 말했다. 진찰을 시작하려고 가운을 들치려던 의사가 멈칫, ‘Why?' 놀라며 나의 기색을 살폈다. ‘봉숭아 꽃말’이라고 해서 웃음바다가 되었다.

 

여름이 진다. 봉숭아꽃도 시들어간다. 들끓던 여름날의 열정을 식히는 가을바람이 스산하다. 그 길목에서 잠시 분주한 일상을 벗어놓고 짧은 명상에 잠긴다. 스산한 역사, 스산한 삶을 되뇌는 성찰의 시간, 붉은 마음, 붉은 꽃잎을 우려내는 따끈한 찻잔에 전설이 어린다. 손톱 위 반달에서 들리는 가야금 소리에 맞춰 옛 노래를 불러본다.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








'권천학의 수필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에 대한 보답  (0) 2019.11.02
그때 그 자리, 거기에!-역사는흐른다  (0) 2019.10.16
시와수필-봉선화  (0) 2019.09.16
인생낭비죄  (0) 2019.08.07
전쟁과평화  (0) 2019.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