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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아꽃물 * 권 천 학 시인 • 국제 PEN 한국본부 이사 모처럼 짬을 내어 별렀던 작업을 시작했다. 손톱에 봉숭아꽃물을 들이는 일이다. 작년 겨울을 끝으로, 뭐가 그리 바빠서 봉숭아 꽃물 들이는 일조차 맘먹고 해야 할 작업이라고 여길 만큼 미루어왔나 헤슬프게 웃으며 서랍을 열었다. 몇 해 전 <당신의 처녀 -봉숭아꽃>이라는 시를 발표했을 때 한 독자가 조그만 선물상자를 보내왔다. 볼연지 통만 한 통에 담긴 봉숭아 꽃잎을 말려 빻은 약간 거친 가루와 사용설명서가 들어있었다. 마른 가루라서 일 년 내내 때를 가리지 않고 물을 들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꽃물을 들이는 방법도 아주 간편했다. 글을 쓰면서 가끔 독자들로부터 여러 가지의 선물을 받아보았지만 봉숭아꽃물은 너무 멀리 와버린 어릴 적 추억을 찾아갈 수 있는 뜻밖의 의미 있는 선물이었다. 어릴 때 동네 언니들 사이에 끼어 손톱에 봉숭아 꽃물들이던 일이 가물가물하다. 봉숭아 꽃물을 들이려면 미리 준비해야할 일이 많아서 하루 전에 시작된다. 즉 봉숭아꽃물 작전이 시작되는 D-1day에 꽃잎을 따서 그늘에 새들새들 말리고, 미리 봐둔 넓적넓적한 아주까리 잎도 따 둔다. 그래야 봉숭아꽃물의 색이 진하고, 아주까리 잎도 야들야들해져 부러지지 않고 잘 감싸진다. 그 다음엔 참숯가루, 백반가루 그리고 흰 무명실. D-day인 당일, 저녁을 일찍 먹고 금님이네 집으로 모여든 또래들이 도란도란, 제각각 맡은 일을 한다. 노련한 순례언니가 돌확이나 사금파리 조각에 살짝 마른 꽃잎과 소금을 섞어 짓찧는다. 부월이는 백반을, 옥자는 참숯가루를 넣고, 나는 아주까리 잎의 뾰족한 부분을 적당히 잘라 낸다. 을순이가 치마말기 춤에서 무명실 꾸리를 꺼내놓으면 준비 끝. 순례언니가 차례대로 손톱 위에 짓찧어진 꽃잎반죽을 콩알만큼씩 떼어 얹어주고, 진두지휘하던 덕이언니는 아주까리 잎으로 잘 싸서 무명실로 동여매준다. 언제나 가장 어린 나부터 해주었다. 언니들은 대개 양손의 넷째 손가락과 다섯째 손가락만 하는데 나에게는 열손가락 모두 해주었다. 밤 깊어지는 줄도 모르고 호호 깔깔... 달빛을 밟으며 돌아와 살금살금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아침이면 아주까리 잎으로 싸맨 봉지가 벗어져 이부자리 여기저기에 납작하게 끼어있기도 하고 때로는 붉은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 시골마을을 떠난 후에는 동생과 함께 했다. 동네언니들이 나에게 해주던 일을 동생에게 전수하면서 동생이 지루해질까봐 간직했던 이야기를 비밀스럽게 속삭여준다. “이 손톱의 붉은 반달이 첫눈 올 때까지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대” “첫사랑이 어딨어 언니?”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뜻이야” 그러면 동생은 얌전히 두 손을 모은 채 잠자리에 들곤 했다. 그 시절 지나가고 메니큐어가 나와 봉숭아꽃물은 전설이 되어갔다. 지금 젊은 아가씨들은 봉숭아 꽃물 들이는 일조차 알지 못한다. 그 사이에 동생이나 나나 머리에 서리가 앉았다. 그리고 나는 카나다로 떠나와 살고 봉숭아 꽃물은 기억에서 아득해져버렸다. 찻수저로 조심조심, 가루를 떠내어 빈 크림통에 담고 병아리 눈물만큼의 물을 떨어트려 되직하게 반죽을 한 다음 콩알만큼씩 떼어 손톱 위에 올려놓는다. 이번엔 엄지발톱까지 호사를 한다. 셀폰을 켜서 ‘영동부르스’를 비롯한 트롯 몇 곡 듣는 동안 20분이 훌쩍 지나간다. 이틀 걸리던 것이 이젠 20분이면 되고 사철을 불문하고 언제든지 가능하다. 그런데도 시간에 쫓겨 자주 못하는 봉숭아꽃물. 다른 때 같으면 설명서대로 손톱위에서 떼어낸 마른 반죽을 물로 씻어내었을 텐데 오늘은 다시 한 번 재활용하려고 따로 떼어둔다. 거의 떨어져가는 가루가 아까워서다. 로션병이 가득할 땐 모르다가 떨어져갈 쯤엔 물구나무를 세워놓고 아껴 쓰게 되듯이. 인생도 이와 같으리라. 젊은 날엔 미처 모르다가 나이가 들수록 흐르는 시간이 정금 같아지듯이. 그래서 황혼이 더욱 붉으리라. 순례언니랑 모두들... 그때를 추억할까? 다들 세상 어느 귀퉁이에서 늙어가고 있겠지. 어떤 모습들일까. 나? 새끼들 옹알옹알 잘 자라고 가족 모두 자글자글 잘 살고 있으니, 이만하면 다 괜찮은 것 아닌가. 새끼를 낳아 나에게 새끼의 새끼와 어울리는 기회를 준 새끼도 고맙고, 귀찮게 굴면서도 엉겨 붙는 새끼의 새끼들도 고마우니... 바랄 건 없다. 한 때, 새끼의 새끼들을 보고 싶어 했으니, 더욱 그렇다. 그래도 소원이라면? 툭 불거져 나오는 한 생각에 망서림도 없이 답이 튀어나온다. 좋은 글쓰기! 그리고 마지막 한 편의 시 쓰기! 추억도, 가족도 아깝고 소중하지만 이제 나머지 삶은 더욱 소중하다. 발그레해진 마음에 봉숭아 꽃물처럼 물들이는 글쓰기를 마지막 소원 삼으면서, 손톱에서 떼어낸 마른가루를 조금 남은 가루와 함께 소중히 갈무리한다. 독자의 가슴으로 옮겨가서 발그레하게 물들이는 글 그리고 마지막 찬란한 소리를 내기위하여 끝없이 가시를 찾아 헤매는 가시나무새의 울음 같은 한 편의 시. 여름날의 땡볕아래 피어난 꽃물로 붉어진 손톱을 바라보는 마음도 붉어진다. ♠ |
당신의 처녀 봉숭아꽃 * 권 천 학 당신의 겨드랑이쯤 다소곳히 비켜서서 울타리 둘레에 오색 꿈 고루 심어 놓고 하늘을 움켜쥔 채 허리 곧게 펴 속 씨를 키우더니 저질러진 사랑을 터트려 멀리 보내고 여름 꿈을 물들이는 노을 손톱 끝에 옮겨 앉아서도 하현달 쪽배에 아쉬움 거두어 싣고 조금 씩 조금 씩 목숨 사위다가 저승길까지 밝혀주고픈 당신의 처녀를 기억하시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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