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호국보훈의 달에-6월의시

천마리학 2019. 7. 1. 00:00




호국보훈의 달에


-한국일보


  • 오피니언 관리자 (opinion@koreatimes.net) --
  •  
  • 26 Jun 2019

권천학 (토론토) 시인-국제 PEN 한국본부 이사


지난 달, 미국의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시에 있는 스프링그로브의 묘지관리인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보고 마음이 짠했다. 90세의 한국전 참전용사 헤즈키아 퍼킨스씨의 장례식을 하루 앞두고 있지만 참석할 유족이 없으니 주민들이라도 와서 마지막을 함께 해주면 좋겠다는 요청이었다. 쓸쓸한 장례식장을 연상하며 내내 마음이 짠한 채로 보낸 다음 날, CNN이 장례식 소식을 전했다.

군악대의 나팔과 백파이프로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멀리 캔터키 주에서 온 포트 녹스소속 군인들이 안장식을 치르고 성조기를 접어 유족대신 관리인에게 전달하는 국기의식까지 마쳤다는 소식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수천 명의 조문객들과 제복을 차려입은 퇴역군인들, 오토바이와 차량들의 긴 조문행렬... 묘지 관리인은 기적이라고 말하면서 감격했다.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 것 같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외국인들에게 맡긴 듯 해서 죄스럽고 민망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전쟁에 참전한 용사였는데... 강원도 백마고지의 화살머리 전투에서 팔 하나를 잃어버린 용사였는데... 나 대신, 우리 대신, 마지막 길을 함께 해준 많은 분들의 모습은 뜨겁고 진한 감동과 함께 반성도 안겨주었다.

평소에도 내가 사는 카나다나 미국사람들이 참전용사에게 각별한 예우를 하고 그들의 희생정신을 높이 새기는 진정어린 모습에도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6월을 맞이하여 몇 군데 봉사활동으로 하는 모임과 강의하는 시간마다 특별히 호국보훈의 내용을 주제로 강의했다. 그때마다 마음을 모아 감사할 줄 알자고, 떠나온 조국에게도, 맞아준 캐나다에도 감사하자고, 이야기 했다. 이번 장례식 이야기도 했고, ‘6월의 를 들려주기도 했다. 거의 모든 분들이 공감하며 감동도 공유했었다. 눈시울이 붉어져서 울먹이는 분도 여럿 있고, 깨우쳐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분들도 여럿이어서 정말 고마웠다. 그런데,

그런데 어느 강의시간에 그 장례식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누군가가 불쑥 말했다. ‘그거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정부에서 다 해줘요.’ 그 순간 숨이 턱 막히면서 말문이 막혔다. 뭐라 설명할 수도 설득할 수도 없이 민망했다. 잠시 말문이 막혀 있다가...

우리는 내가 잘 사는 것, 내 가족이 잘 되는 것만 바라지 말고, 주변을 돌아보며 살자고. 백세장수시대라고 그저 오래살기를 바라면서 몸 건강만 챙기지 말고 마음 건강도 챙기자고, 나 말고, 내 가족 말고 내 주변을 챙기는 것이 마음 건강의 지름길이기도 하다고, 그리고 알게 모르게 혹은 보이게 보이지 않게 우리를 에워싼 주변의 고마움을 찾아보며 헤아릴 줄 아는 마음이 건강한 삶이라고, 떠나온 조국에게도, 큰 불편 없이 살게 해주는 이 나라에게도, 오늘의 우리가 있게 한 그 모든 은혜에, 감사하고 보은하는 마음을 가져보자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간곡하게 이야기 했다. 그리고 나 스스로 상념에 빠져들었다.

만약 토론토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면 몇 사람이나 모였을까? 정부에서 다 해줄 테니, 다른 사람들이 갈 테니, 하는 안이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 속에 나도 있지 않을까? 골프 치러 간다고, 모임약속 있다고... 하면서 지나쳐버리는 사람 중에 나도 포함되지 않을까?

자성(自省)의 마음을 스스로 짚어보면서 독자들에게 호국보훈의 달의 경건함을 시로 얹어 보낸다


                            6월의 

                                        -현충일에 부쳐

 


                        아들아!

                        호박꽃 초롱에 개똥불 밝히고

                        남몰래 외로움을 키우던 아들아!

 

                       청보리 익히는 바람결에

                       역사의 늪은 깊어만 가는데

                       꽃다운 너희들의 순결한 피와 흰 뼈 묻힌

                6월의 산야에 귀를 기울이면

                       들려오는 소리

 

                       잊어서는 안 된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뼈를 깎는 그 소리

                       오장이 떨려 말할 수 없어

 

                      보릿고개 허기를 샘물에 동동 타 마시고

                      청올치 질긴 가닥으로 살았던

                      우리네 목숨

                      삐비꽃 피는 언덕에서

                      속절없이 바람만 불어온다 해도

                      누구라도그 누구라도

                      풀꾹새 우는 뜻을

                      눈물로 새겨 듣지 않으랴

 

                      아들아!

                      초여름 보리누름에 오금이 쑤셔

                      밭둑길 내닫던 아들아!

 

                      개구리 논배미 물꼬 터놓고

                      피멍 고인 목울대 씻어내어도

                      아물 길 없는 그날의 아픔

                      아카시 꽃자리 메꾸며

                      차오르는 나이

 

                      언젠가,

                      그 언젠가 돌아와 서야 할

                      그대들의 자리

                      보릿단 묶어낸 바람결 끝에

                      벼가 자라고 있는 들녘에 서면

                      살아있는 목숨이 그저 부끄러워


 


-2019년 6월 6일, 한인회관에서 열린 현충일 추념식 행사와 

2019년 23일 오타와 한국전쟁 기념식 행사에 참석, 시낭송 함.





'권천학의 수필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낭비죄  (0) 2019.08.07
전쟁과평화  (0) 2019.07.24
라과디아 공항에 가고 싶다!  (0) 2019.06.22
장미의 이름으로  (0) 2019.06.11
가우디건축물에 한글주기도문  (0) 2019.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