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장미의 이름으로

천마리학 2019. 6. 11.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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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이름은 '리오 삼바'-독자 노부코로부터



장미의 이름으로

-한국일보



  • 오피니언 관리자 (opinion@koreatimes.net) --
  •  
  • 27 May 2019

권천학 (토론토) 시인-국제 PEN 한국본부 이사


바야흐로 장미의 계절이다. 나는 수많은 시간을 건너 장미 정원에 당도했다. 옆동네 하이파크에서 벚꽃세상이 펼쳐졌다는데 나는 장미 보러 간다. 꽃 중의 꽃 장미.
나는 장미이고 싶었다. 화려한 야회복을 입은 여왕이고 싶었고, 새빨간 입술로 세상을온통 유혹하는 팜므파탈이고도 싶었다. 그 마음에 장미가 화두로 심어졌다.
장미의 시 한편을 쓰기 위해서, 그 치명적인 아름다움으로 물든 시 한 편을 빚고 싶어서, 썼다 지웠다, 이미지를 세웠다 허물었다, 하면서 불면에 시달렸다. 그냥 불면의 밤이 아니라 온통 붉어 흥건한 아름다운 고통, 그 맑음으로 피어나는 아침을 맞는 꽃잎이고 싶어 불면의 밤을 안고 뒹굴었다. 장미 속에서 길을 잃기도 했고, 취하여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잠의 수렁에 빠지기도 했다. 새벽 창을 열면 바람결에서 향기가 묻어나고, 풀밭을 거닐면 맨발에 차이는 이슬에서도 향이 올랐다. 가시와 색깔과 향기로 상징되는 꽃, 장미! 장미를 위한 시, 장미를 닮은 시 한편을 구워내듯, 삶도 그러하고 싶었다.

장미는 장미인줄 모르고 나비는 자신이 나비인 줄 몰랐다. 사람들이 장미를 장미라고 부르자 장미가 붉어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나비를 나비라고 부르자 비로소 나비가 되었다. 장미는 장미가 되기 위해서 가시를 매달았고, 나비는 날기 위해서 날개를 달았다. 장미는 가시바늘을 갈고 나비는 비단날개를 짜는 밤이 이어지는 내내 단단한 비밀 매듭의 고리에 서로가 매달려 끝끝내 풀리지 않는 화두를 끌어안고 수수께끼 같은 존재의 비밀을 찾아 떠도는 떠돌이, 장미가 나비에게 젖을 물린다. 비단꽃잎을 펼쳐 마름질하던 장미는 스스로 갈아낸 바늘에 찔리기도 한다. 손끝에서 피가 돋는다. 핏물에 실 끝을 적셔가며 엮어낸 드레스 한 벌...
-나의 시 <화두> 일부
 
그쯤에서 멈췄다. 양이 차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가시가 심장을 찔러댔고, 숨을 멎게하는 향기가 코끝에서 맴돌았다.
가시와 꽃, 누군가가 말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꽃이 왜 하필이면 가시가 달렸느냐고. 그토록 뾰족한 가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다고. 가시 속의 가시와 꽃 속의 꽃을 생각했을 터이니 그는 분명 시(詩)를 알리라. 인생을 알리라.


모시는 말씀


가시를 갈아 꾹꾹 눌러 쓴 초청장을 보냅니다
초록 바퀴를 가진 바람 우체부 편에
짤막한 파티
절정에 이른 몸짓으로 밤잠 설치며
겹겹이 타오를 줄 아는 당신만을 모십니다
들숨과 날숨 사이
빗물에 적신 햇볕을 끼워 짠 아랑주(紬)에
살점 문질러 진하게 물들인
새빨간 야회복을 입고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이 꼭 오신다면
몰래 감추어 둔 꽃술 한 잔도 마련하겠습니다
5월이라고 쓴 팻말을 따라
꿈의 계단을 올라오십시오


-나의 시 <모시는 말씀-장미의 이름으로>.


이 초청장을 모든 독자들에게 띄워놓고 나는 다시 발칸으로 간다. 숲이 우거진 불면의 밤으로 간다. 향기를 만들기 위하여. 남들 다 자는 밤에 홀로 깨어 장미비단을 짜기 위하여. 가시가 있어 장미가 더욱 고혹적일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꽃을 지키기 위하여 가시를 더욱 예리하게 갈 수밖에 없다. 가시와 불면의 삶이었기 때문에 향기가 배어나온다. 추위와 어두운 밤, 고난과 고통이 없는 삶은 향기로울 수 없다. 고통 없는 삶을 두려워하시라. 고통이 있어 우리의 삶이 더욱 값질 수 있음이니 고난과 역경은 축복이다. 자정이 넘도록 홀로 깨어 장미비단 위에 수를 놓아가는 나의 시 한편, 나의 밤은 여전히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