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아랑낭자(阿娘娘子)들의 피눈물

천마리학 2019. 4. 11. 23:54





아랑낭자(阿娘娘子)들의 피눈물 * 권 천 학

 

 

버닝썬, 성폭력... 끊임없이 일어나는 미투!(Me too!) 관련 사건들, 소문에 소문을 더해가며 한때의 흥밋거리로 떴다 질 뿐,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한 결말을 볼 수 없으니 그저 답답할 뿐이다

이런 일이 거론될 때마다 한동안 꿈자리가 어수선해서 잠을 설치곤 한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들추어지지만, 힘 있는 사내들의 권력에 의해 어물버물 안개만 피워 올리는 미궁의 사건들. 그동안 수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당히, 흐지부지 두리뭉실하게 연막만 칠 뿐, 석연찮은 이야기만 만들어내는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만다. 권력의 비호가 펼쳐짐을 다들 짐작하지만 모호했고, 실체는 밝혀지지 않은 채, 오히려 세상의 관음증적인 흥미와 말초적인 관심거리를 만들어 낼 뿐이다. 이거야말로 권력과 범죄 사이의 굿 이노프 딜(Good enough deal)이 아닌가.

 



37일은 성 접대의 수모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자연의 10주기다. 드디어 그날 밤 그 술자리에 동석한 동료 배우가 몇몇 언론매체를 통하여 당시를 증언하며 실체를 밝혀달라고 나섰다. 실명과 얼굴을 공개한 첫 증인이다. 얼굴을 드러내는 데 십년이 걸렸다. 내내 숨어 살 듯, 지켜보면서 답답했고, 절망했고, 두려웠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그동안 장자연의 유서로 알려진 문건은 유서가 아니라 강요에 의하여 쓴 것이며, 그것은 살기 위한 기록이었을 거라는 말이 비수처럼 꽂힌다. 이제 직접관련자가, 책임 있는 자가, 죄 있는 자가, 스스로 밝히고 나왔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면서도 여전히 답답하고, 절망스럽고, 두렵다고 했다.

 

옛날 옛적 밀양의 한 고을에 해괴한 일이 벌어진다. 새 원님이 부임할 때마다 열흘을 못 넘기고 죽어나가는 것. 원귀(冤鬼) 때문이라는 짐작만 떠돌 뿐이다. 사실이 규명이 되지 않은 채 흉흉한 소문으로만 계속되고, 사또들 사이에 그 고을발령을 꺼리는 기류가 생긴다. 실체 없는 소문만 실은 채, 세월은 흐른다. 고을 인심도 새 원님이 부임할 때마다 어디 이번엔 얼마나 버티나 보자! 넌지시 지켜볼 뿐 실체파악에 대해선 관심이 멀어진다. 그런 중에, 흉흉한 소문의 진실을 밝혀보자! 작심하고 나선 한 담대한 원님이 있었다. 그는 자원해서 그 고을에 부임해온다.


부임 첫날 밤, 사방으로 횃불을 밝히고, 담장 안팎으로 경비를 촘촘히 세우고, 머리맡에 칼을 두고 비장한 각오로 잠자리에 든다. 잠이 올 리 없다. 괴괴한 긴장 속에 자정을 넘기자 휘익! 네 방구석에 찬바람이 휘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일어선다. 머리맡의 칼을 움켜잡고 벌떡 몸을 일으킨다. 숨 막히는 어둠속, 병풍 뒤에서 바람의 소용돌이가 인다. 누구냐? 온 힘을 다하여 칼을 움켜잡은 손을 높이 쳐든다. 그 때, 병풍 뒤에서 스르르, 머리를 풀어헤친 소복(素服)의 여인이 피를 흘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어선 털끝마다 신경이 곤두선다. 사또~ 피 묻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원한 맺힌 소리에 심장이 멎는 듯. , 누구냐? , 사람이면 말을 하고 귀신이면 썩 물러가라! 있는 힘을 다하여 말한다. 사또~ 소녀의 원한을 풀어주옵소서! 소녀는 이 마을에 살던 부사의 딸 아랑이라 하옵니다. , 뭐라구? 저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유모 손에 자랐습니다. 아름다운 나이에 사랑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 그게 어떻다는 것이냐? 어느 날 밤, 관노와 유모가 작당한 꼬임에 빠져서 달구경을 나갔다가 관노에게 겁간(劫姦)을 당했습니다. 죽을힘을 다하여 저항했지만 제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끝내 칼에 찔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 그래서? 저의 시체는 대숲에 버려졌고, 저의 아버지는 딸이 정혼한 남자를 두고 외간남자와 바람이 나서 도망갔다는 헛소문 때문에 사직(辭職)을 하고 고향을 떠나야했습니다. , 정말이냐? 죽어서도 죽지 못한 원한을 풀길이 없어 새 원님이 부임해 올 때마다 하소연하려고 나타났지만 그때마다 원님들이 기절하여 죽어버렸습니다. 이제 담대하신 사또께서 저의 원한을 풀어주시기를 간청하옵니다. 부디 저의 억울함을 풀어주시옵소서. 너를 헤친 놈이 어떤 놈인지 아느냐? 내일 아침 사또께서 관노들을 불러모아주시면 흰나비 한 마리가 그놈의 머리위에 앉을 것이옵니다. 알았다, 네 뜻을 알았으니 썩 물러가라!


다음날 아침, 조회(朝會)시간에 사또는 특별히 모든 관노들을 불러 모은다. 어디선가 팔랑팔랑 흰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관노들 사이를 돌다가 한 관노의 감투 위에 앉는다. 사또는 그놈을 잡아 죄 값을 물어 처형한 후, 병졸 몇을 데리고 영남루 대밭으로 가서 대숲을 헤쳐 보게 한다. 칼이 꽂힌 채 썩지도 않은 아랑의 시체를 발견한다. 시체에 꽂힌 칼을 뽑는 순간 뼈만 남고 형체는 사라진다. 뼈를 거두어 예()를 갖춘 다음 볕 좋은 자리에 묻어주고, 강가에 아랑각(阿娘閣)을 지어 해마다 아랑낭자의 혼백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게 한다.

원한을 풀어준 담대한 그 원님은 이상사(李上舍)이고, 아랑은 밀양부사의 딸 윤동옥(尹東玉)이다. 지금도 영남루 아래, 남천강가에 있는 아랑각에서는 해마다 아랑의 제사를 지낸다. 밀양아리랑도 그 전설을 바탕으로 지어졌다.


 


성남지사의 여배우스캔들도 명쾌한 결론 없이 지루한 밀당에 지쳐 끝내는 힘에 부친 여배우가 접어버렸다. 얼마 전, 뻔뻔함의 극치를 보여준 En선생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승소한 최영미시인의 소식을 들으며 같은 시인으로서, 같은 여성으로서 미안함을 금치 못했다. 침묵한 나도 공범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곤장을 쳐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미투(Me Too), 처벌이 솜방망이어선지, 여기저기서 여전히 권력의 연막작전은 펼쳐진다. 아랑이들은 끊임없이 생기고, 대숲에 버려지고, 가슴을 치며 혼자 운다. 더 이상 아랑이는 없어야 한다.

여자의 한은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리게 한다는데, 권력과 꼼수는 아랑이들의 가슴에 박힌 비수를 더욱 깊게 박을 뿐이다. ‘오뉴월 서리가 철퇴를 동반한 벼락이 될 수 있음을, 검은 권력은 인권이 최대이슈가 되는 이 시대에 양심 있는 인간임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과 같음을 깨닫기 바란다. 그리하여 꿈자리도 맑아졌으면 한다.◆ 




-한국일보 2019년 3월 10일 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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