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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칙서

천마리학 2020. 6. 7. 00:04

낙엽칙서

권천학(국제PEN클럽한국본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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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피니언 관리자 (opinion@koreatimes.net) --

  •  11 Nov 2019 한국일보

 

낙엽칙서 * 권천학

-시인 • 국제PEN클럽한국본부 이사

 

이 계절의 아침산책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시시각각 붉어지고 노랗게 물들어가면서 눈물겹게 황홀해지는 나무들의 모습을 보는 일도 예사롭지 않고, 나뭇잎 비늘들을 밟고 지나가는 가을바람도 예사롭지 않다. 간밤에 조곤조곤 다녀간 가을비조차 예사롭지 않은 아침, 앞뒤 뜰에 날아와 앉은 낙엽들이 마음을 붙든다.

나날이 가을색으로 짙어지고 있는 울타리주변의 풍경을 보면서 강가의 나무들은 얼마나 달라지고 있을까. 자주 다니는 험버강의 산책길에 서 있는 가을 나무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빨리 만나야지, 서둘러 나서는데, 현관의 두터운 유리문에 찰싹 붙어있는 낙엽 몇 장. 가슴이 섬뜩하다.

섬뜩함을 진정시켜가며 동네 안길을 벗어난다. 늘 다니던 낯익은 길, 그 길가의 나무들과도 눈을 마주치며 일일이 눈인사를 나눈다. 모두들 가을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강가에 도착할 때까지 까닭 없이 두근거린다.

바람결 끝물에

문 앞까지 당도한 칙서 한 장 받잡고

가슴이 덜컥!

사는 게 늘

덜컥덜컥 내려앉는 일이더니

삶이 끝내 바람결이었구나

 

-나의 시 [낙엽칙서] 전문

 

다리 아래 작은 낙차(落差)를 통과하는 물소리가 더욱 목청을 높이고 있다. 강가에 늘어서서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이 엊그제보다 더 고와졌다. 문득, 꽃무더기처럼 보인다. 혈기 왕성하던 시절로부터 물러나 앉은 꽃, 향기를 버리고 가지에서 내려서는 꽃, 욕망을 버리고 마지막 종착역으로 향하는 모습, 눈에서 마음으로 무색(無色)의 향기를 전달하는 가을의 꽃, 낙엽!

한때는 뜨거워서 펄펄 끓는 열(熱)로 피워 올리던 안개가, 수증기들이….

한때는 꽃이었고 향기였고, 한 때는 욕정의 시간을 견디며 새끼를 밴 짐승이 되어 통통한 몸속에 열매를 품었던,.. 회한(悔恨)으로 가득 차서 걷는데, 곁에서 함께 달리는 물소리도 꾸준히 따라온다. 물소리 위에 음표를 찍어가며 무문(無紋)의 무늬를 만들어내는 청둥오리의 쉰 목소리가 귀를 채운다. 촉촉이 젖은 채 바닥에 깔린 낙엽들이,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초록의 나뭇잎이었던 낙엽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 그런데, 그 잎마다 까만 얼룩의 반점들이 찍혀 있다.

 

지름이 최소한 1cm 이상 되는 원형(圓形)의 검은 얼룩반점들. 숯덩이가 되어가듯 타들어가는 모습으로 잎들마다 두 세 개씩 혹은 너댓개씩 찍혀 있다. 생각해보니 이런 모습이 처음은 아니다. 전에도 가끔 검은 얼룩이 박힌 낙엽들을 보긴 했지만 그때마다 그냥 그렇게 넘기고 말았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관심이 쏟아져 기어이 허리를 구부린다. 왜 그렇지? 한 잎을 주워들고 들여다본다. 과학적으로야 곰팡이거나 바이러스이겠지만... 문득 우리의 삶이 느껴진다. 맞다, 그래, 누군들, 어느 삶인들 상처 없는 삶이 있을까. 살면서, 살아내면서 아픔도 많았고 멍 드는 일도 많았을 우리네 삶. 다 말하지 못한 채 속 깊이 감추어둔 서러움이, 외로움이, 야속함이, 그리고 억울함이 단단하게 돌덩이로 굳어졌을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일생을 말로 하자면 소설 한권이 넘을 거야‘ 흔히 듣는 말이다. 숯덩이처럼 가슴속 타는 일을 누구에게 다 말할까. 맺힌 매듭을 어떻게 일일이 다 풀어낼까. 나무라고 다르랴. 돌덩이 같던 아픔으로 ‘가슴애피’를 앓았고 그 단단한 상처를 껴안고 살아 낸 지금, 이제 돌아가는 길목에서 스스로 뱉어내는 꺼멍반점! 내려놓아야하는 순간에 이르러 다 비워내고 가벼이 떠나는 나무의 삶. 얼마나 아팠을까. 처연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을 살펴보았다. 서있는 나무들이 잎잎마다 까만 반점들이 새겨져있어서 마치 얼룩무늬를 가진 나뭇잎처럼 보인다. 무심했구나! 놀라워라! 떨어져서 비로소 얼룩반점이 돋아난 것이 아니라 살아서, 살아있는 목숨으로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면서부터 서서히 몸속을 비워내는 나무. 가을이 되면서 돌아갈 때쯤을 미리 예감하면서 비우고 떠날 준비를 하는 정화(淨化)의 시간이었구나. 노년이 바로 저런 시기로구나. 노년이 되어서도 소소한 노탐(老貪)과 노욕(老慾)을 버리지 못하는 주변의 모습들을 보면서 느끼는 안타까움. 종종 겪는다. 버리고 떠날 줄 아는 나무만도 못한 우리네 삶이 참으로 가엷다.

비워서 아름다워져야겠다. 집을 나설 때 받은 낙엽이 칙서가 되어 유난히 아프게 살갗을 파고 들었던 이유를 이제는 알겠다. 그리고 또 하나. 들여다보지 않았더라면 그냥 낙엽지는 나무로만 보였을 것을, 찬찬히 들여다봄으로서 보게 된 낙엽들의 검은 반점. 그래, 관심을 가지고 응시하면 보이지, 보이면 알게 되고, 알면 용서도 하게 되지. 그리고 그게 사랑이지.

작은 깨달음 하나 더 얹은 오늘아침의 산책길이 마냥 좋다! ♣

 

impoe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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