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삭제되고 있다 * 권 천 학
나는 날마다 작아지고, 줄어들고 ···, 시시각각 사라지고 있다
날마다 최소한 세 번씩 뜸 잘 들여 담아내는 밥공기 속으로 끼니때마다 끓여내는 보글보글 찌개냄비 속으로
‘오늘 이 자리에 ***교수님, • • •회장님, 시인님 그리고 그 밖에도 많은 시인들이 참석해주셨습니다.’의 ‘그 밖에도 많은 시인들’속에 나는 있으나 마나로 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귀빈 여러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총재님, 사장님, 대표님,……국회의원님, 그 외에도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만 시간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의 ‘시간 관계상 생략’에 묶여 나는 ‘많은 분들’로 생략되고 있다
‘안동권씨 동정공파 34세 寧 자 吉 자, ……, 장자 五赫, 이남 五昇, …… 김실……’의 큰딸이면서도 아들인 두 동생 뒤로 밀려나 있는 비문, 돌에 박혔으나 애매한 간접화법으로 희미하다
그 외에도 나는 많이 있다, 나는 없다 문인행사의 좌석 숫자에, 선거 때만 내미는 악수의 상대 어쭙잖은 유권자로, 귀걸이 코걸이로 써내는 신문기사 속에서 의견도 이름도 물어오지 않은 불특정다수의 만만한 ‘국민’이란 단어 속에, 패키지로 엮여 공항 로비로 줄줄이 끌려나온 트레불 에이젠시의 굴비두름으로 그 밖에도 곳곳에,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게 나는 있다 그러나 나는 없다
때때로 15%~20%의 백화점 정기세일로 때로는 50% 특가세일로 팔리거나 심지어 떨이, 창고대방출로 몽땅 처리되는 자본주의의 왕창 싸구려로도 있다
오늘도 나는 있다 봉분 없는 무덤처럼,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리는 컴퓨터의 딜릿트 키 아래 조마조마 숨죽이며
나는 분명 있으나 나는 정녕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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