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몸보다 소중한 그 무엇

천마리학 2014. 3. 1. 07:00

 

 

 

몸보다 소중한 그 무엇 * 權 千 鶴

 

 

나의 작은 공간에 모차르트의 미뉴엣 21번으로부터 시작한 바이올린 선율이 퍼져나가고 있다. 벌써 몇 번째 반복해서 다시 들으며 생각에 잠긴다. 여의도에서 가진 조카의 독주회 음반이다. 창밖엔 멀리 잎 떨군 나무들을 배경으로, 가까이 창가에 다가선 침엽수 둥치를 기어오르던 다람쥐 한 마리가 멈춰 서서 갸웃거린다. 녀석도 모차르트를 좋아하나보다.

 

지난여름이었다. 예일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코스의 마지막 학기를 치르고 있는 조카가 지하철역에서 사고를 당해 한국으로 돌아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신인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한 조카는 그 동안 세계투어 연주회를 비롯하여 여기저기 연주회를 한다는 소식을 들어왔고, 한국에서의 연주회를 준비 중이라는 소식도 듣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사고라니, 미국에서 치료받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가기까지 하다니, 설마 의사인 즤 아버지 믿고 한국 가서 어리광을 부리는 것을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쳤지만 그럴 것 같진 않았다. 아무리 막내딸이라곤 해도 일찍부터 부모 떨어져서 혼자 미국에서 공부해 온 녀석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예사롭지 않은 사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매우 걱정이 되었다.

 

알아보니, 지하철 플렛폼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넘어져 발목과 팔을 다쳤다고 한다. 미국에서 초기치료를 받다가 아물지 않고,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해서 한국으로 돌아가 본격적인 치료를 받게 된 것이었다. 넘어지는 순간 안고 있던 바이올린 케이스를 놓아버리고 몸을 추슬렀더라면 다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조카는 온몸으로 바이올린을 껴안은 채 나뒹굴었고, 그 결과 발목뼈와 인대가 심하게 상하고 팔과 어깨에도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몸을 다친 것이야 안 좋은 일이지만, 그만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제가 다루는 악기를 제 몸보다 더 아낄 줄 아는 마음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보다 아끼는 그 무엇? 그것은 이미 인생의 의미를 진지하게 깨달아가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몰두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 일을 위해서라면 그 일을 위해서는 밥쯤은 굶어도 좋고, 몸이 좀 상해도 괜찮다. 그 정도가 되면 이미 아마추어가 아니라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물감이, 조각가에겐 조각칼이, 글을 쓰는 사람에겐 원고지가, 연주가에겐 악기가…… 바로 조카가 거기에 해당한다. 지인 중에 음악애호가가 있다. 성능 좋은 오디오시스템을 갖춰놓고 늘 음악에 빠져 사는 그는 외출할 때도 그 오디오가 잘 있는지 염려되어 일찍 들어가곤 했다. 지금이야 컴퓨터로 원고 작업을 하지만 한때는 나에게도 원고지가 귀중품이었다. 출판사에서 만들어 준 전용원고지를 따로 쌓아두고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의 나에게는 컴퓨터가 귀중품이듯이, 조카에겐 바이올린이다.

 

누구에게나 밥보다 혹은 자신의 몸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이 있을 수 있다. 오래 사용하다보면, 혹은 자신이 몰두할 수 있는 일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물건이거나, 각별한 사연이 담긴 물건 등, 아무리 무생물이지만 정()이 가게 된다.

 

필요해서 하는 일과 좋아서 하는 일의 개념이 다르듯이, 필요한 물건과 소중한 물건의 개념 역시 다르다. 필요한 물건이야 없으면 잠시 불편할 뿐이고 다른 것으로 대치하면 되지만, 소중한 물건은 없어지면 다른 것으로 대치한다 해도 상처가 된다. 따라서 조각가가 자기 손에 맞는 칼이 있듯이, 신기료장수가 자신의 손에 잘 맞는 망치가 있듯이, 오래 함께 하다보면 손에 익고 정이 들어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자신이 조각한 여인상 갈라테이아와 사랑에 빠진 피그말리온(Pygmalion)처럼.

 

조카가 만약 몸을 사렸더라면 석 달 여의 병원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고, 마지막 남은 한 학기를 더 늦추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와 동행하는 물건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바로 그 점이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배신하지 않는 의리와도 같다. 몰두할 수 있는 일을 가진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 일을 함께 해나가는 동행이 있다는 것, 그 동행에 감사함을 안다는 것, 그것이 동행에 대한 예의이며 겸손이며 동시에 성숙이다. 따라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숙성시켜나갈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도 된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돈만 있다면 얼마든지 좋은 악기를 살 수 있고, 설령 사용하던 악기가 부서져도 애달아 할 필요 없이 새로 사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쉽게 할 수도 있을 텐데, 부지불식간에 제 몸처럼, 아니, 제 몸보다 더 바이올린을 생각하다니. 바이올린이 비록 생명 없는 물질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이미 조카에겐 분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카가 기특하다.

 

 

 

 

 

 

조카에게도 바이올린 연주가들이 최고로 치는 스트라디바리나 과르네리, 과다니니를 가지는 것이 꿈이겠지만 꼭 그런 명품이 아니더라도 지금 다루는 악기를 자신의 몸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정도라면, 됐다! 머지않아 더 깊은 차원의 음악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아울러 인생의 우물에 더 깊이 추()를 담글 수 있게 될 테니까.

이제는 다친 곳도 다 치료되고, 여의도에서의 독주회는 성황리에 마쳤다. 몰두할 수 있는 일을 찾지 못해 오래 방황했던 나의 젊은 시절 한때를 회상하며, 여전히 컴퓨터를 귀중품으로 여기며 사는 것이 즐거운 지금의 나를 조카에게서 본다. 나보다 일찍 몰두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이 행운이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어떻게 궤도수정이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아직은 젊기 때문이다. 대학으로 다시 돌아가 공부에 여념이 없을 조카에게 언제 무슨 일을 하든, 성심껏, 진지하게 하라는 마음의 메시지를 응원으로 보낸다.

 

모차르트에 이어 드보르작과 드빗시 그리고 프로코피에프의 곡들이 조카의 바이올린에 실려 더욱 유려하게 흐르고 있다. 창밖의 다람쥐도 멀리 떠나지 않고 아직도 오르락내리락 하는 걸 보면 모차르트보다 내 조카의 바이올린 선율을 더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갓 서른 즈음의 조카가 바이올린을 자신의 몸보다 더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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