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홍보석

천마리학 2014. 2. 7. 06:38

 

 

홍보석 * 권 천 학

 

 

 

간밤 내내 심상치 않은 조짐으로 잠을 설쳤다. 새벽녘 창문을 열었을 때 그럼 그렇지! 첫눈이 내렸다. 알겠다. 밤사이 누군가 모르게 나의 꿈길로 찾아와 쏘새기던 이유를.

이제는 세상일 대개는 안 봐도 뻔하고, 사람들 이야기도 들으면 속내까지 짚어질 만큼의 나이가 되었으니 마음에도 굳은살이 붙어 무덤덤할 법도 한데, 눈 내리는 밤이라고 잠이 불편하다니. 이 무슨!

한 때는 봄이면 살 트느라고, 여름이면 이글거리느라고, 가을이면 스산해지는 감정의 부침(浮沈)를 겪느라고, 겨울이면 또 어둠의 깊이를 재느라고, 감정의 기폭이 아슬아슬 서커스의 줄을 타듯 안전선을 넘나들 때가 있었다. 지금은 마음만이 아니라 몸도 느낀다. 바람이 몰아치는 밤이면 두근두근 인생이 휘날리듯, 비가 내리는 밤이면 쏘삭쏘삭 싹이라도 틔울 것처럼, 하물며 혁명군들이 하얗게 덮쳐오는 밤이 어찌 심상찮을 수 있을까.

 

 

 

바람 몰아치는 밤이면 바람에 휘날리고, 비 내리는 밤이면 비에 흠뻑 젖어들 듯, 어울리지 않는 낭만이라고 해도 좋을 묘한 분위기에 뒤척거릴 수 있으니 여전히 살아있음 아닌가. 하물며 간밤은 첫눈이 내린 밤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세상 모두가 잠 든 사이에, 캄캄한 어둠 속에서 모종(某種)의 사건이 전개되는 것도 모르기보다는, 다소 부대끼더라도 무덤덤한 것보다는 심상찮은 게 낫다. 휘날리며, 젖어들며, 세월의 그을음을 털어내느라 오만 군데 삭신을 파고드는 쑤석거림이 결코 서글프지만은 않다. 오히려 설레어 좋다. 이 나이에 무슨! 아니지. 이 나이에 이럴 수 있으니 좋은 것 아닌가.

그 기분 그대로 눌러 담은 이른 아침, 손자 녀석 아리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첫눈이 좋아서 깡총거리는 아리는 할머니의 마음도 그렇다는 걸 알기나 할까. 큰길로 연결된 골목 어귀, 눈에 익은 울타리가 눈여겨보아진다. 나지막한 나무울타리에 매달린 새빨간 열매들이 눈을 쓰고 있다. 어떤 것은 모자로, 어떤 것은 외투로. 매일 지나치며 눈을 마주쳤건만 오늘 아침의 그 모습은 예사롭지 않다. 아리가 교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급한 마음으로 되돌아 와 골목길 어구 그 앞에 다시 섰다.

모양과 크기가 석류 알을 닮은 그 열매들의 성장과정을 나는 안다. 봄날 저 혼자서 싹이 틔우고 묵은 가지 마디마디에서 뽑아 올린 새 가지에 파릇파릇 작설 같은 잎을 피워내고 여름이 되면서 이파리 사이에 초록의 열매들을 조롱조롱 매달았다. 붉어지는 일이 허망한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직은 풋풋한 시절이 안쓰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서 넌 아직 초록이구나, 언제 붉어질래?’하고 오며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늦여름부터 붉은 빛이 돌기 시작한 열매는 사춘기의 홍조(紅潮)를 더해갔고, 가을로 접어들면서 줄기는 쇠잔해져 야위는 기색이 보였다. 잎은 성글어져 탈모현상으로 아침마다 빠져나가는 머리카락을 쓸어 담으며 서늘해지는 오십 넘는 나이 같아서 지켜보기가 무망했다. 그 무망함으로 가을여행을 떠났다.

달포가 넘게 집을 비우고 돌아왔을 때 토론토는 어느 새 초겨울이었다. 여전히 되풀이 되는 일상. 골목어귀를 지나칠 때마다 들여다봤다. 이미 초록을 다 지워낸 열매는 농익은 여인의 립스틱 짙게 바른 입술이거나 그 입술에서 뿜어 나오는 숨결이었다. 어쩌다 성글게 남은 잎들이 말라비틀어진 갈색 흔적으로 바짝 여윈 줄기 여기저기 매달려있을 뿐 그 황량한 풍경은 새빨간 열매를 돋보이게 했다.

 

홍보석!

첫눈을 면사포처럼 쓰고 있는 오늘 아침 눈에 싸인 홍보석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나의 공간 어딘가에 걸어두고 싶어서 홍보석을 달고 있는 마른 가지 몇 개를 비틀어 꺾었다. ‘참 곱다!’를 되풀이하면서.

조심조심 물에 씻고 이리저리 만지는 사이 홍보석 몇 알이 떨어졌다. 문득 호기심이 발동했다. 얼마나 달콤할까? 떨어진 보석 한 알을 주워 입술에 물었다. 조심스럽게 혀끝을 갖다 대는 순간 앗! 상상을 초월하는 쓴 맛, 혀끝을 베는 칼날이었다.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 너도 그랬구나! 너도 바람 부는 밤, 비 내리는 밤이 예사롭지 않았구나. 폭풍과 무더위, 그리고 예상치 않은 변고(變故)에 그 가녀린 줄기로 도사리며 목숨을 도모했을 너.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도 천적(天敵)들의 공격을 막아낼 무기로 쓴맛까지 저장해 두었다니. 아름다움엔 꼭 아름다움을 지켜낼 극약이 필요한 법이지. 나의 밤이 무심하지 않듯, 너의 밤도 무심하지 않았었구나. 나의 밤은 앞으로도 더욱 무심하지 않아야겠구나.

초록의 풋 열매를 보석으로 갈다듬기까지 평생의 온 힘을 불어넣고도 모자라 너 떠난 후의 뒷일까지 대비하여 방편을 예비(豫備)해 두었다니. 혹시 첫눈 내린 아침에 나에게 올 것까지 미리 예상한 것은 아니니?

고마워! 반가워! 첫눈 내린 이 아침, 또 한 번의 깨우침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