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도 먼저 나온 놈이

 

 

똥도 먼저 나온 놈이 * 권 천 학     지난 20일은 24절기 중의 마지막인 절기인 대한(大寒)이었다. 소한(小寒)네 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는 대한. 올해 이곳 캐나다의 겨울은 대한이 소한네 집에 가고 말고 할 것 없이 대한의 막강한 기세로 이어지고 있다. 그 외에도 ‘소한 얼음이 대한에 녹는다’는 말도 있지만 그건 날씨 이야기이고, 나에겐 그 말과 함께 떠오르는 아버지의 말씀이 있다. ‘똥도 먼저 나온 놈이 먼저 뭉그러지는 법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참 속 좁은 맏이였구나 하는 후회만 들지만 그런 과정을 겪어 오늘에 이르렀음을 안다. 제각각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사는 동생들의 행동에 불평할 일이 뭐 있을까만, 집안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비록 딸이지만 맏이여서 두 남동생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후에도, 내가 한국을 떠나오기 얼마 전까지도 자질구레한 집안일에 늘 앞장서왔다. 그런 중에 사소한 일이지만 가끔 불만을 터트리는 일이 바로 전화 거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나 부모님께서는 ‘니가 전화해라’ 하신다. 평상시 안부전화도 나더러 하라고 하셨다. 사실상 그 일은 나의 성격상 처음부터 내가 시작한 일이기도 하지만, 하다보니 습관도 되고 또 부모님께서 바라시기도 했고, ‘맏이’라는 의무감도 끼어들었다.  그런데 이게 수월치가 않다. 언제나 내쪽에서 일방적으로 행해지는 것 때문이었다. 버튼터치만 하면 될 일인데 바로 그 간단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늘 내 쪽에서만 해야하다니. 전화라는 게 마음이 없이는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더욱 동생들의 무심함이 서운했다. 언제부턴가 간간이 투덜대기 시작했지만 묵살돼버렸다. 아들을 싸고도는 어머니의 섭정(攝政)이 작용했다. 매사, 아들들에게 얼큰하다 싶으면 사소한 일도 미리 가로막아버리는 어머니 때문에 아들들은 무풍지대의 나무처럼 무덤덤이 되고 딸은 딸대로 피해의식만 갖게 되었다.             꼭 이래야 되는가. 언제나 맏이인 내가 먼저 전화를 해야 겨우 안부라도 들을 수 있고, 짤막한 대답을 들을 수 있으니...... 안부전화 한 통 없는 동생들의 무심함이 서운하고 괘씸하기도 했다. 큰일에서는 ‘출가외인’이란 말로 월권행위나 불가침으로 차단시키면서 사소한 일들로 전화나 해야 하는 맏이, 그래서 ‘관두세요, 알아서들 하겠지요.’ 하거나 ‘즈이들은 전화 걸어오면 손가락이 덧나나?’ 하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 ‘똥도 먼저 나온 놈이 뭉그러지는 법이다!’였다. 어머니는 여전히 ‘바쁜 사람들이 어떻게 전화를 하니?’하고 동생들을 옹호하셨다. 하이고! 교장에, 병원장에, 고급공무원이시니, 흥, 어련 하실라구! 하는 속생각을 못 참아서, ‘즈이들이 대한민국 다 떠받치고 사는 모양이네.’ 하고 뱉어내면, ‘성격이 그런 걸 낸 들 어떻게 하니?’라고 다소 누그러진 반응이지만, 아들에 대한 앞가림은 여전했고, 결국은 불평하는 그 자체를 나무라시며 나를 죄인 자리에 세우고 만다. 동생들이 나에게 전화하지 않는 것만 가지고 그런 건 아니었다. 나야 그럭저럭 사니까 상관없지만 IMF 이후 어렵게 되어 힘겨워진 막내에게 오빠들이 둘이나 있으면서 평소 안부전화라도 한 번씩 해주면 좋으련만, 그것마저 하지 않는 것이 속상해서 ‘막내에게 전화 좀 가끔 해주라고 하세요’ 하면 항상 어머니는 여전히 ‘시켜도 안 듣는 걸 낸들 어떻게 하니?’ 하신다. 나를 꾸짓기에 앞서, 아들들 변호하느라 한 단계 낮아진 수위로 막음하고 말지만 나는 그 대목에서 속으로 불경스러운 생각을 또 하고 만다. ‘그게 다 엄마의 앞선 방패막이 때문이죠’ 하는. 아들딸 편애가 심한 것이 불만인데 전화안하는 것까지 옹호하고 나오니 정말 싫었다. 그런데 어찌됐던 그동안 그냥저냥 해온 일임에도 불구하고 불쑥 괘씸하다는 생각을 한 후부터는 전화할 일이 생길 때마다 전화하기가 더 수월찮아졌다. 전화를 하긴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엔 낀 서운함에 ‘너희들이 먼저 전화 좀 하면 안 되니?’ 하기도 하지만 듣는지 마는지, 피식 삼배바지 방귀 새는 소리로 넘어갈 뿐, 해오던 관행으로 이어졌다. 하옇튼,   동생이 넷이나 되지만 먼저 해오는 안부전화를 받아본 일이 거의 없다. 어쩌다 꿈에 떡 얻어먹기로, 그것도 오십 넘은 후반부터의 일이지만, 가까이 사는 막내여동생이 몇 번, 그것도 대개는 우리집에 오기 위하여 내가 집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전화로 기억될 뿐이다. 전화는 먼 거리에 더 유용한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부산 사는 큰 여동생은 멀리 사니까 그렇다 치고, 같은 서울에 사는 두 남동생도 완전 적막강산이었다. 그런데, 딱 한 번, 큰 남동생이 전화를 해온 일이 있다. 그것도 국내통화가 아니라 국제 통화였다(토론토에 살게 된 후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이거야말로 기록이다.           2008년 8월, 미국의회도서관에서 독도의 명칭을 ‘리안쿠르 롹스(Liancourt Rocks)’로 바꾸려고 했을 때, 그 사실을 맨 처음 알아낸 사람이 토론토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한국학 책임자로 있는 김하나, 바로 나의 딸이었다. 이미 미국국회에서 인준이 났고, 주 정례회의에서 보고라는 형식적인 절차만 거치면 되는 다급한 상황이었다. 청와대와 총영사관, 미 대사관 등 요로에 알리고 명칭변경을 저지하는 온갖 노력을 하느라고 그 여름, 7월을 힘겹게 보냈다. 그 결과 미국으로부터 명칭변경을 보류하게 만들었다. 그 일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관련 국내외 언론사와 메스컴들은 물론 네티즌들이 김하나를 애국자로 거론하며 불볕더위보다 더 들끓었고, ‘김하나’가 검색 순위 1위로 올라가기도 했다. 한국정부에서는 김하나의 권유를 받아들여 외교통상부에 우리나라 영역의 상황을 수시로 체크하는 모니타링 제도를 실시했다. 그 일을 해내는 동안 모략과 위협으로 우리집 전화는 불통상태로 만들어서 날마다 녹음되는 응답메시지만 가득했다. 바로 그 때, 한국에 있는 큰남동생이 전화를 해왔다. 물론 즉답은 못하고 앤써링으로 녹음이 되긴 했지만.  ‘하나야, 큰삼촌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서 참으로 큰일을 해냈구나. 정말 자랑스럽다. 요즘 너 때문에 나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살맛난다. 수고했다.……’   요즘이야 시도 때도 없이 카톡으로 소식 주고 받고, 응답하느라고 자다가도 깬다. '이제 잘거야, 굿나잇!' 하고 보내면 '잘자!' '땡큐!' '후후후 카톡으로 잠깨우는 것도 재밌네' '진짜 잔다!'하며 자꾸만 이어진다. 과학의 발달 덕택인지 아니면 우리 모두가 철이 드는 것인지. 나를 비롯하여 느지막하게 철든 든 동생들 때문에 즐겁고 애틋하다.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는 것’도 맞고, ‘소한 얼음이 대한에 녹는다’는 말도 맞고, 더불어서 ‘똥도 먼저 나온 놈이 먼저 뭉그러지는 법이다!’라는 아버지의 말씀도 맞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새기며, 야속하기만 했던 그것도 우리 부모님의 사랑 방식이었다는 것도 깨달아가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