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중독되고싶다

천마리학 2014. 3. 18. 06:44

 

 

 

 

중독되고 싶다 * 權 千 鶴 

 

 

한 때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에 중독된 일이 있다. 하루 온종일을 쉬지 않고 듣고 듣고 또 듣기를 반복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연속녹음을 한 테잎을 틀기 시작하여 잠들 때까지 앞뒤로 바꿔가면서 쉬지 않고 들었다. 듣고 듣고 또 듣고…… 질리기는커녕 끊임없이 듣고 싶어졌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일이건 빠져들 대상이 있어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언제, 어떻게 그 중독에서 벗어났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 시절이 그립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무반주 첼로 곡에 빠져있듯, 한 가지에만 몰입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이 그립다. 한 날 한 시도 조용하지 못한 일상 속에서 정서는 메말라가고 잡다한 일상에 얽매여 한가로움도 없이, 빨라진 시대의 속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멀미를 앓아가며 발버둥치는 사이 잃어가는 것이 많다는 생각 때문이다.

 

지인 중에 클래식음악에 중독된 사람이 있었다. 80년대였다. 반찬거리 장보기를 하러 다니던 시장의 귀퉁이. 아는 사람이 아니면 눈에 잘 띄지도 않을 만큼 조그만 간판을 내건 허름한 털실가게 주인이었다. 어느 날 시장 길에 우연히 유리문에 붙은 '손뜨개질'이라고 쓴 종이가 눈에 띄었다. 손뜨개에 관심을 갖고 있을 때였다. 고개를 숙이는 기분으로 들어가야 하는 가게 안은 비좁고 어둠침침했다. 털실상자 몇 개가 쌓여있고 전등불빛을 가장 많이 받는 가운데 부분에 손뜨개로 만들어진 옷들이 진열되어있는 조그만 진열장이 달랑 한 개 있을 뿐, 너저분한 해보니는 그 가게로 들어서는 순간 흐르는 클래식 선율, 가게와는 어울리지 않아 뜨악해하는 나를 뜨악하게 맞는 주인 여자. 처녀인지 아줌마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매우 수더분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 해 겨울 한 철을 손뜨개를 배우며 그 여자와 사귀었다. 시장을 오가며 들렸고, 일부러 가기도 했다. 지금은 이름도 잊었지만, 화장기라곤 찾아 볼 수 없고 옷차림도 수수해서 처녀임에도 불구하고 아줌마로 보이는 그 여자는 말수가 적었지만 일단 말문을 트고 보니 통하는 부분이 있어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속이야기까지 나누게 되면서 그가 돈벌이를 위해서 장사나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철학을 확실히 가지고 있음도 알았다. 장사에 악착을 떨지 않고 그저 손님이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욕심을 내는 것은 오직 좋은 음악을 멈추지 않고 듣는 것이었다. 아침에 가게 문을 열 때부터 저녁에 닫을 때까지 음악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이야기를 나무며 손뜨개질을 하곤 했다. 그는 음악 없는 세상을 생각할 수가 없다고 했다. 오디오 기기는 당시에 꽤 이름이 있던 '에로이카'라는 제품으로 기억되는데, 당연히 그에게는 보물 1, 재산목록 1호였다. 그는 저녁에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오디오기가 밤새 안녕한지 염려가 되고, 아침에 문을 열 때마다 별일 없이 잘 있을까 항상 조마조마해 했다. 동대문 도매시장으로 털실을 떼러 가는 날에도 오디오가 걱정돼서 웬만한 볼일은 생략하고 서둘러 돌아왔다. 시집갈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음악에만 빠져 지내는 그에게 털실가게는 결혼독촉이나 생활의 간섭을 받지 않고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 놓고 들을 수 있는 혼자만의 세계였고, 혼자만의 유일한 공간이었다. 나는 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한 시절을 같이 보낸 여행객이었다. 한때나마 학창시절 이후 잊어버린 음악의 세계에서, 말문이 통하는 사람과 한 철을 행복하게 보냈다.

 

캐네디언 친구하나는 괴기물(怪奇物) 수집광이다. 나이가 오십이 코앞인데 아직도 괴기스럽고 무시무시한 인형이나 조각품이 나오기만 하면 사들인다. 몬스터, 도깨비, 마녀, 드라큘러…… 할 것 없이 세계 각국의 온갖 괴기스토리와 관련 있는 것들을 모으고 역사적으로 사연이 있는 끔찍한 사건이 얽혀있는 조각들도 거의 가지고 있다. 그가 수집한 물건들은 창고에 그득 쌓여있는데 그의 꿈은 그것들을 다 진열할 수 있는 집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괴기물 수령(首領)이다. 그는 가끔 수집한 무시무시한 조각품들의 그림이 프린트 된 티셔츠를 입고 나타나기도 하고, 자신의 컴퓨터가 고물이어서 인터넷 경매를 하기 위해서 나에게 오기도 한다. 내가 보기엔 터무니없이 비싼 값인데도 그걸 사려고 경매에 열을 올리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또 값이 상당한 괴기 인형들을 비싼 배달비용까지 들이면서 외국으로부터 사들이는 그를 볼 때마다 쓰잘떼기 없는 물건에 돈 들이지 말고 여자 친구나 구해라하고 퉁박을 주지만 전혀 먹히지 않고, 나 역시 인터넷에서 가끔 괴기스러운 물건을 발견하면 그에게 제공하여 그의 중독증에 동조하기도 한다. ‘이그, 그러느니 컴퓨터나 좀 새것으로 바꾸지!’ 해도 그는 여전히 빙글거리기만 한다.

 

그를 알게 된지 얼마 안 되는 어느 크리스마스 시즌에 그의 초대를 받았다. 나를 위한 특별이벤트라고 하였다. 그가 준비한 안대를 끼고, 그의 식순(式順)대로 그의 안내를 받으며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 베이스먼트 계단을 내려갔다. 그의 지시에 따라 안대를 벗었을 때, 으악! 푸르스름한 불빛에 머리카락을 휘덮고 시뻘건 눈에 불을 켠 악마의 모습에 주저앉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툭 툭 튀어나오는 귀신, 가느다랗게 흘러드는 푸른 불빛 사이로 으스스 감도는 찬바람, 피 흘리는 촛불, 핏물에 목욕하는 여인, 흉측한 괴기물들…… !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그 후로는 그의 초대에 응하지 않는다. 초대할 때마다 나중에 모두 진열이 되면! 하고 토를 단다.

이 지독한 수집광은 아직까지도 결혼할 생각은 하지 않고 여전히 인터넷 서핑을 통해 괴기물에 대한 뉴스를 검색하고, 각국의 괴기물 공장이나 유통업자들이 내놓는 신상품에 대한 정보를 꿰뚫고 있으며 수시로 경매에 응찰하여 배송 받고 있는 중이다. 어쩌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응찰에 성공하면 기분 좋아 외식하자고 하기도 하고, 어떤 땐 꼭 사고 싶은 물건이었는데 다른 응찰자에게 뺏겼다고 전화로 푸념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언제 철들 거야?’하고 핀잔을 주지만 사실 그 말의 이면에는 미칠 수 있는 당신이 부럽다라는 뜻도 포함된다.

 

중독, 매력 있는 말이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여 자신을 온통 쏟아 부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가장 안전한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재고, 계산하며 두 눈 홉뜨고 경쟁적으로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정신적 무풍지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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