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도둑은 보라, 쪽지의 추억

천마리학 2013. 10. 11. 04:39

 

 

 

 

 

도둑은 보라 * 권 천 학

  -쪽지의 추억

 

건영아파트에 살 때였다. 어느 토요일 오후, 평소보다 일찍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이었다. 아파트의 건물 뒤편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가 사는 동()으로 가는데, 우리집 라인의 길에 하얀 스티로폴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길 옆 화단의 나무들 가지위에도 여기저기 얹혀있었다. 순간 우리집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라는 직감이 스쳤다. 무슨 일이지? 도둑이 들었을까? 마음이 다급해져 입구의 경비실에 먼저 혹시 우리집에 누구 찾아온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부터 물어봤다. 아무도 없다고 했다. 불길한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겨울이라서 외풍을 막으려고 북쪽에 접해있는 복도 쪽 방의 쇠창살과 안쪽의 유리문 사이에 덧대어놓은 스티로폴이 군데군데 조각나 너덜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쇠창살 안으로 손을 넣어 뜯어내다 말았다. 덜컥 겁이 났다.

두근두근, 현관문을 발로 툭툭 차며 안의 기색을 타진한 후 열쇠를 따고, ‘다녀왔습니다!’ 늘 하던 대로 아무도 없는 안을 향해서 큰소리로 인사를 하며 안의 동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집안은 조용했다. 다 둘러봐도 침입한 흔적이 없었다.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쇠창살 안으로 손을 넣어 스티로폴 조각을 뜯어내다가 말았을까. 스티로폴을 뜯어내는 중에 누군가 이웃집 사람들이 나타났다거나 아니면 경비원이라도 지나갔다든가 그도 아니면 내가 돌아올 시간이 가까워져서 멈췄을지도 모른다. 틀림없이 다시 올 것 같았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예정되어있는 산악회의 모임에 갈 일이 망설여졌다. 하루 종일 집을 비우는 일이 석연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안 갈 수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행장을 차리고 찜찜한 마음으로 집을 나서면서 밤새 궁리해서 마커로 굵게 쓴 쪽지를 쇠창살 위에 붙였다.

 

 

도둑에게,

다시 왔다면, 그냥 가는 게 좋을 거요. 들어와 봐도 헛수고일 테니!

왔다 갔다는 흔적이라도 남기길! 주인!’

 

짧은 문장이지만 몇 번을 고쳐 썼는지 모른다. 청탁원고를 쓸 때 못지않게 어려웠다. 존칭을 쓰거나 애걸하는 꼴을 보이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막말로 쏘아부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제목부터 신경이 쓰였다.

 

도둑은 보시오. 들어와도 훔쳐갈 물건이 없으니 헛수고만 할 겁니다. 그러니 그냥 돌아가세요. 혹시 이 쪽지를 보았다면 보았다는 흔적이라도 남기시면 고맙겠습니다. 주인!’

 

 

처음에 쓴 문장이었다. 애걸에 고맙기까지? ! 그러나 정말 왔다 갔는지, 오지 않았는지도 알아야 마음을 놓을 것 같아서 흔적이라도 남겨놓으라는 주문을 한 것이다.

도둑놈에게’, 처음엔 이렇게 썼지만 도둑 주제에 더 화를 낼까봐 무섭고, 그렇다고 도둑님에게하기는 싫고, ‘도 빼고 도둑에게.

본문도 긴말 하고 싶지 않았다. ‘오셨다면?’ , 노우, 그래서 왔다면’, 으로. ‘좋을 거다’,라고 쓰고 싶지만 역시 무섭다. 그래서 좋을 거요. 최대한 줄여 만든 문장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속을 들키는 것만 같아서 요렇게 조렇게 고치고 고친 결과물이 쪽지글이었다.

, 벼룩의 간만도 못한 겁쟁이 나여!

 

 

 

 

 

산행을 하면서 동료문인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아침에 나설 때의 찜찜함과 온종일 불안해야 할 일이 싫어서 털어버리고 가벼운 기분이 되고 싶었다.

연장자인 엄시인, 내가 도둑이라면 더 들어가고 싶겠다하하하. 장교수, 권시인 다워. 변시인, 역시 기발해. 문 회장, 이런 글을 쓴 주인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해 하겠다. ……등등 모두 농담 삼아 웃어넘겼다. 나도 덩달아 웃으며 댓거리했다. 댓거리를 하면서도 그들이 겉보기와 다른 내 심정을 눈꼽만큼이라도 이해할까? 내가 가랑잎 소리에도 소스라치는 겁쟁이라는 것을 짐작할까? 과연 내가 세상살이를 얼마나 무서워하며 쫌뺑이처럼 살아가는가를 알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언제나 무심할 뿐인데.

 

하긴 무슨 뾰족한 대안이나 응원을 기대한 것도 아니고 다만 나의 불안감을 떨쳐버리려고 농담처럼 꺼낸 이야기니까 그들이 무심한 것도 개의치 않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늘 찬 바람이 부는 섬이 있고, 잡아먹으러들 때 무서운 표정으로 으르렁대며 달려드는 동물과 달리, 웃음 띈 얼굴로 등치고 간 내먹는 고등동물이 사람이라는 것도 이미 알기에. 늘 적당한 거리, 보이지 않는 방어선을 치고 사는 것이 사람관계 아닌가. 겉으로야 상냥해 보일지 모르지만 더 이상은 접근금지, 냉정 혹은 무심을 방어의 철책으로 주변을 둘러치며 사는 게 인간세상 아닌가. 세상이 늘 나에게 무심하듯 나 역시 무심(無心)했으니까. 그들이 나에게 유심(有心)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야 어떻든 간에 정말 도둑이 글 쓴 사람이 더 궁금해 하겠다는 말이 다시 마음 귀퉁이에 걸려들어 갈근거렸다. 정말 그럴까? 그러면 어떻게 하지?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겁쟁이 심사. 그래도 겉으로는 대범한 척, 불안한 마음을 지그시 누르며 웃었다.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 생각해도 우습다. 지금은 우습지만 그땐 심각한 일이었고 심란했었다. 먼 추억이 되어 편하게 이야기 할 뿐이다.

아무튼, 그날 오후, 돌아와서 혹시 무슨 흔적이라도 남겼을까싶어 살펴보았지만 아침에 붙여둔 그대로였다. 그러나 떼지 않았다. 그 도둑이 며칠 후에라도 다시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면서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끝내 아무 흔적도 없는 쪽지를 열흘을 버티다가 떼어내고 말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세상살이에 겁쟁이이고 미흡하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느냐고들 하지만 못 담글 때도 있었다. 아직도 그럴 때가 있고, 웃으며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헤아릴 수 없어 더러는 조심스럽다. 헛디디거나 헛짚고 싶지 않아서 돌다리를 두드릴 뿐이다. 오직 아무 일도 없기만을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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