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벗기 * 權 千 鶴
내가 가장 싫어하는 동물 뱀에 대한 이야기를 또 해야겠다. 정신세계 속에 잠재되어있는 관념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 없이 끔찍하게 싫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아는 한 모 기자의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좋아한다지만. 그건 순수한 어린아이의 심성으로 파충류를 좋아하는 취미일 수 있으니까 수긍한다.
오래전, 이불 호청을 꿰매고 있는데 이웃집 꼬마가 이불 위로 뭔가를 휙 던졌다. 뱀이었다. 그 순간 혼절하고 말았다. 사람들이 달려오고, 온몸을 흔들어대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고무로 만든 장난감이었다. 장난감인줄 알면서도 보는 순간 다시 한 번 소스라쳤다.
한국전쟁 이후, 가난 속에서 안정을 찾아가려고 노력하던 그 시절, 우리 동네 부잣집 동렬이네 집에 수시로 뱀이 나타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울타리에 늘어져 있기도 하고, 토방 아래에서 기어 나오는 뱀을 일꾼이 망태기에 담아 잿간에 버렸다고도 했다. 새벽녘 밥을 지으러 나온 부엌어멈이 솥뚜껑 위에 엎어놓은 바가지를 들추면 그 안에 실뱀이 똬리 틀고 있고, 물 항아리 바닥에도 사리고 있다는 것, 정말 뱀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동렬이네는 그렇게 망해갔고, 결국 동네를 떠나 종무소식(終無消息)이 되었다.
토론토에 와 살게 되면서 넓은 공원, 보기만 해도 뒹굴고 싶어지는 잔디, 여기 저기 무성하고 드넓은 풀밭과 자연…… 참 좋았으나 맘 놓고 뛰어들지 못했다. 행여 뱀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뱀이 있다면 그림의 떡일 뿐이니까. 나는 그만큼 뱀이 싫다. 어느 날 캐네디언 친구로부터 캐나다에는 뱀이 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안심, 비로소 천국이 되었다. 캐다나는 정말 살기 좋아! 하는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 그런데 작년 10월 23일, Green Bricks Park에 갔다가 숲길에서 뜻밖의 뱀을 보았다. 대가리는 풀숲에 박고 몸뚱이와 꼬리가 길의 폭을 반 너머 가로 질러 있는 늘어진 형상이었는데, 움직이지 않고 있으나 죽지는 않은 상태였다. 등허리에 길게 잿빛 몸뚱이에 노란 색 줄무늬가 선명했다. 기함하다시피 물러섰다. 지나는 사람들이 들여다보기도 하고 집적대는 것 같았는데, 나는 소름을 돋운 채 재빨리 그 자리를 도망치고 말았다. 도망치면서도 어쩌면 동면(冬眠)의 시기를 놓친 건 아닐까, 서리를 맞지 않았을까, 안위(安危)가 염려 되었다. 그날 이후 캐나다의 공원은 나에게 다시 그림의 떡이 되어버렸다.
시애틀의 Garden and Glass에 전시된 치흘리(Chijuly)의 작품
에덴동산에서 원죄(原罪)의 상징으로 등장한 것을 비롯하여 뱀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악함, 간교, 유혹, 배신 등의 부정적 의미가 있는가하면 지혜, 불사(不死), 재생(再生), 수호신(守護神) 등 긍정적 상징의 풀이도 하고 있다. 부정적 의미의 승화 또는 반전(反轉)이다.
뱀은 유난히 호불호(好不好)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특이한 동물이다. 호불호를 떠나서 십이지(十二支)의 6번째 동물로 등장시킨 것을 보면 뱀이 우리에게 주는 특별한 의미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일 억 육 천 만 년 전에 지구상에 출현했으니 십이지에 등장한 열 두 동물 중에서 가장 오래 된 동물이기도 하다. 뱀의 해로 치는 올해 10간(十干)의 마지막을 차지하는 계(癸)는 수(水)의 성질로 검은 색을 뜻하므로 '검은 뱀' 또는 ‘물뱀의 해’라고 한다. 물뱀은 독이 없는 뱀이다. ‘검은 뱀’, 작년여름 여행 중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지대인 세인트 베르나르드 산악지대에서 나를 질겁시켰던 사주(蛇酒)가 떠오른다. 그 지방 사람들이 보여준 투명한 액체의 술병 바닥엔 검은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우리나라, 중국, 일본 등 동양권에서만 뱀술을 담가먹는 줄 알았는데, 어느 곳이든 사람은 다 같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하기도 했다.
악(惡)도 필요하고 부정(否定)도 의미가 있음이 우리의 삶이다. 싫건 좋건 부정할 수 없는 뱀의 존재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는 허물벗기라고 생각한다. 치열하게 작품생활에 몰두하면서 그 고통을 뱀의 생애에 비유하는 사유(思惟)를 하기도 했고, 발이나 날개가 달린 짐승과 달리 평생을 어둡고 음습한 곳을 온몸으로 기며 목숨을 이끌어야하는 뱀의 숙명, 그것을 천형(天刑)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창작의 과정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중에 내재(內在)되어 있는 악마성(惡魔性). 굳이 성선설과 성악설을 끌어다 대지 않아도 우리는 쉽게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악마성에 놀랄 것이다. 선과 악의 경계에서 끝없는 욕망에 휘둘려 늘 위태롭게 오르내리며 죽지도 못하는 골롬(Gollum)과 같은 존재.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중에서 인간 속에 내재된 악마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그래서 가장 인간다운 등장인물이 골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무기! 용이 되지 못한 뱀. 천년을 살아야, 살면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허물을 벗고 또 벗어야 용이 되어 승천할 수 있다.
치흘리(Chijuly)의 작품 부분을 찍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끝없이 탈바꿈을 하지 않으면 그냥 독사(毒蛇)이거나 이무기에 불과하다. 어제보다 내일이 달라질 수 있도록, 수평의 삶을 수직의 삶으로, 음지의 삶을 양지의 삶으로, 얽매임을 자유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허물벗기를 끝없이 시도해야 한다.
옛 어른들이 십간십이지의 열 두 동물 속에 뱀을 포함 시킨 것이 바로 그런 깨우침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선인들의 혜안에 놀라며 감사할 뿐이다. 선과 악의 동행, 욕망과 자성(自省)의 공존, 성취의 실패의 과정 등. 그리하여 가장 인간적인 모습. 어느 한쪽을 완전히 선택하고 실행하기엔 인간의 두뇌구조가 허락하지 않는다. 그 경지를 초월하면 성인(聖人)이거나, 현자(賢者)이거나, 신(神)의 경지다. 그제야 불사신, 수호신으로서의 상징이 성립된다. 이무기와 용의 차이다. 그러므로 뱀의 ‘허물벗기’는 죄에 대한 벌(罰)과탈(脫) 운명의 도약(跳躍) 의미를 동시에 포함한다. 교훈이라고 해서 다 교훈이 아니다. 지혜라고 해서 다 지혜는 아니다. 사람에게든 동물에게든, 자연에게든, 이 세상 존재하는 만물에게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면 지혜라고 할 수 없다. 꾀 일뿐이다. 순간을 모면하는 꾀, 요령(要領)에 지나지 않는다. 이로울 때 비로소 지혜가 되고, 큰 지혜가 모든 존재를 살리는 것이다. 뱀의 상징 중 불사(不死), 재생(再生)의 의미는 바로 그 큰 지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라진 혀와 굳어진 사고(思考)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곧 허물벗기이며 큰 지혜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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