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브름힐다라면? * 權 千 鶴 -일제강점기 찬양론에 대해서
오랜만에 좋아하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장고, 분노의 추적자(Django Unchained)’를 감상했다. 남북전쟁 당시의 멕시코 국경지역에서 벌어지는 노예의 처절한 복수극이다. 현상금 사냥꾼 바운티 헌터 슐츠(크리스토프 왈츠)는 자신을 도와준 댓가로 장고 프리맨(제이미 폭스)을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주고, 파트너로 만든 후, 장고 프리맨이 오로지 노예로 팔려간 아내 브룸힐다를 찾으려는 생각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장고의 아내 찾기에 합세한다. 천신만고 끝에 브름힐다를 소유하고 있는 악덕농장주 캘빈 캔디(디카프리오)의 농장을 찾아가 아내를 구해내기까지의 이야기다. 인종차별을 주축으로, 노예들 간의 갈등과 배신까지도 아우르는 초대형 웨스턴 블록버스터로 스파게티 웨스턴 스타일의 이 영화는 분명 미국의 잔혹사 한 부분으로 피비린내가 질펀한 복수극임에도 불구하고 간간이 코미디 같은 장면으로 웃게 만든 것은 그 자체가 주제의 무거움을 희석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의 패권주의(覇權主義)와 지배역사를 반성하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특별한 안목이 엿보였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최근 일제강점기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떴다 사라진 잔 소용돌이를 떠올렸다.
오색딱다구리
일제강점기가 우리의 근대화를 발전시키는데 공을 세웠다는 고 아무개(박찬웅)씨의 주장에 대한 설왕설래로 찬반의견이 오갔다. 그런 의견은 이미 오래 전에 나온 것으로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이나 일반 국민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개인적인 의견으로, 한물가도 많이 한물 간 퇴색한 주제다. 고 아무개 씨도 그 중의 하나로 여겨지는데 왜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끄집어내어 소득 없는 파문을 일으키는지조차 소모적인 일일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 뒤늦은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그 소용돌에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의견도 있었고, 반대의견이라 해도 국제적 관계를 감안해서 ‘긍정적’으로 봐야한다는 끝맺음도 있었다. 그렇다 아니다의 의사표시가 아니고 두리뭉실, 이도 저도 아닌 글도 있어 실망스러웠다. 모든 사물에 대한 평가가 사람마다 다르듯, 역사를 보는 눈도 다를 수 있다. 단 어떤 평가든 정확히 파악하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정확한 이해와 판단에 의해서 자신의 주장을 정립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대해서는 피해당사자로서의 우리가 분명한 인식을 갖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의견이 없으면 차라리 그냥 침묵하고 있으면 된다. 때늦은 거론이었지만 이참에 우리의 의식을 정리정돈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나도 의사표시를 한다. ‘긍정적’이란 표현도 일본의 행위를 긍정적으로 봐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해서 비참한 과거사에 매몰되지 말고 뛰어넘어야한다는 의미여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말하자면 ‘잘 사는 것이 복수’이듯,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하되 그것에 매달려 머뭇거리지 말고 그것을 참고삼아 앞으로 나아가자는 뜻일 때 동의한다. 반세기를 넘어선 지금까지도 일본은 여전히 위안부, 독도, 역사왜곡 등의 문제들을 청산하지 않고 침략행위를 계속하고 있는 현실이라서 더욱 그렇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다스리려는 의도에서 여기저기 건물을 짓고 철도를 가설하고, 제도를 만든 것은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는 우리의 경제권을 독점하고 토지·자원의 수탈을 목적으로 세운 국책회사이다. 경부선, 경의선 등의 철도 건설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한 병력과 군 장비 수송을 하기 위한 것이었고, 국내의 물자를 실어내는데 원활한 교통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땅을 싼값으로 강제 수용했고, 통행료 없이 사용했고, 임금착취는 말할 것도 없다. 동진강유역의 수리사업도 우리 농민을 위해서가 아니다. 김제평야의 곡물을 실어내가기 위한 운하였다. 기타 등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이제 세월이 흘렀고 세상이 바뀌었다. 지금의 발전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우리는 폐허의 땅에 삽질을 하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그때의 잔재시설들이 우리의 교통, 문화, 경제발전을 앞당겼다고 보다니. 근대화의 공로나니, 오산(誤算)이다. 자위 치곤 참 서글픈 자위행위이고 착각도 그런 착각은 나라는 망치는 일이 된다. 너무 슬프다. 우리에겐 아무런 의지가 없단 말인가? 우리가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덕을 봤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意志)를 묵살하는 것이다. 그래서 슬프다.
영화 ‘장고, 분노의 추적자’는 최근의 논의를 비교 설명할만한 두 가지 유형의 인간이 등장한다. 장고의 아내 브름힐다와 악덕농장주 캔디의 헌신적인 집사 스티븐(샘 잭슨)이다. 둘 다 흑인노예이지만 서로의 태도는 정반대다. 브룸힐다는 불어를 쓰는 전 주인이 말상대 노리개로 삼기 위하여 가르쳤기 때문에 드물게 불어를 구사하는 노예가 되었지만 노예 신분에 저항하고 끝없이 탈출을 시도한다. 스티븐은 주인에게 혼신을 다해서 충성하는 개다. 주인의 최측근이라는 위세로 같은 노예들을 괄시하고 차별한다. 주인이 총에 맞아죽자 해방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같은 동족을 향해 반격을 가하는 이른 바, 혼까지 팔아치운 진짜 노예근성을 보여준다.
한번 생각해보자. 주인에게 개처럼 봉사하는 스티븐, 먹여주고 입혀주며 알량한 권위로 같은 흑인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권한을 은근히 묵인해주는 주인을 고맙게 생각하는 그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브름힐다, 탈출에 실패하여 홀라당 발가벗긴 채 뙤약볕 내려쬐는 뜰 한가운데 파놓은 구덩이에 던져져 몇날 며칠을 굶주림과 공포에 시달리는 등, 갖은 수모를 겪으며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존엄성은커녕 짐승이었다. 그럼에도 불어를 가르쳐준 주인에게 감사해야 할까? 우리 중의 누가 스티븐이고 누가 브름힐다인가. 아니, 당신이 바로 스티븐이라면? 그리고 브름힐다라면? 돼지에게 진주가 아니라 배고픈 돼지가 낫다. 또 한 번 슬프다. 골수까지 세뇌되어 자신이 노예라는 것조차 못 느끼는 불감증인 스티븐 때문이다. 우리에게 내재된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는 주장 때문이다. 영화를 통하여 잠시 오가는 논란을 떠올리고, 그냥 넘길 수 없어 한 마디 하고 마는 나를 누군가는 국수주의라고, 민족주의라고 몰아 부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나라의 주권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이라면 기꺼이 민족주의자이며, 국수주의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권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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