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백담사에서 연희동까지

천마리학 2013. 9. 5. 01:31

 

 

 

 

백담사에서 연희동까지 * 권 천 학

 

 

수고가 많소. 국민을 대할 면목이 없소.’

전 전 대통령이 추징금을 받아내기 위하여 연희동 자택에 들이닥쳐 빨간 딱지를 붙이는 검찰청직원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 그 글을 읽는 순간, ‘면목 없을 얼굴이 있기나 했나?’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뒤집어 말하자면 국민의 한 사람인 나로서도 체면안 서는 일이고, 염치없는 일이다. 우리 국민들 무두의 심정이다. 그를 대통령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그가 수중에 27만원밖에 없다고 했을 때 면목도 체면도 없어졌고, 구걸하는 거지보다도 더 거지가 된 셈이고 내내 면목 없고 체면 없는 행동으로 일관해왔다. 따라서 지켜보는 우리 국민들도 마찬가지다.

 

백담사에서 열린 문학세미나에 참석했을 때였다. 그들 부부가 국가로부터 쫓겨나 백담사에 머물다가 다시 속세로 되돌아간 지 몇 해 안됐을 때다. 그들 부부가 살았던 방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을 보고 참 부끄러웠다.

가구가 일체 들어갈 수 없는 아주 조그만 옛날식 시골방, 삐까번쩍한 가구들은 아예 들이기를 거부하는 방. 바닥은 반들반들한 장판이었고, 책 한 권을 펼쳐놓고 읽을 수 있는 크기의 손때 묻은 앉은뱅이책상이 정갈했다. 벽엔 옷을 거는 횃대가 있었고, 방문 앞 조그만 댓돌과 그 댓돌 위에 나란히 놓여있던 두 켤레의 고무신도 기억난다. 옹색해 보이지만 누추하지는 않았던 방, 그 방을 들여다보면서 사람이 저렇게 간소하게도 살 수 있구나 생각했다. 갈아입을 옷 몇 벌, 육신을 눕힐 수 있는 크기의 따뜻한 방, 끼니를 챙길 수 있는 소반만 있어도 삶을 영위하는데 충분하다는 것,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오히려 탈이라는 자각을 다시 한 번 했다. 수행하는 스님들의 생활이 더욱 반들거리게 다가왔다. 전직 대통령이 유배를 당했던 자리로 국민들에게 혹은 그곳을 찾은 외국관광객들에게까지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씁쓸하고 창피스러웠다. 걸레스님이라고 일컬어지던 중광스님의 방에 차를 얻어 마시러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피하듯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었다.

 

면목 없다는 그 말에 미안해하는 구석은커녕, 되레 유들유들 뻔뻔하게 느껴지니 어찌된 일일까? 그만큼 신뢰와 기대를 저버렸다는 의미일 것이다. 비난과 조롱이 가득한데 대통령이었으면 뭐하나. 챙길 면목도, 세울 체면도 없다면 그간의 삶을 막 살아온 것이고, 지금이라도 회복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지금도 막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어떻게 살든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라고 친다면 우리들과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대통령으로 모셨던 사람 아닌가. 우리는 슬픈 국민이다. 아무리 권세가 좋고 돈이 좋기로서니 막 살듯 살아서야 어디 살아있는 목숨이랄 수 있을까.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속담이 있다. 행여 대통령이 그러니 그 나라 국민들도 그러리라는, 혹은 국민이 그러니 대통령이 그렇다는 평가를 받을까 염려도 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다 하는 생각들을 곱씹으며 능소화를 생각한다.

 

 

 

루피나님 영상

 (마땅한 능소화 그림이 없어서 어떤 사이트에 올려져있는 저의 시 이미지를 차용했습니다.)

 

 

 

                          진다

                          내장까지 붉어 벙글어진 여름이

                          툭

 

                      

                          내려놓는다

                          땡볕에 달구어진 생애를

                          툭

 

 

                          몽땅 던진다

                          익어 충만한 채로

                          툭

                          툭

 

 

                          사랑도 저러하리라

                          목숨도 저러하리라

 

 

                          툭

                          툭

                          툭

                          저러해야 아름다우리라

 

                    

 

                                                     -졸시 <능소화> 전문

 

 

옛날의 사대부 집안에서는 높이 쌓아 올린 담장 안의 뜰에 능소화를 심지 않았다고 한다.

피어있을 땐 탐스럽고 보기 좋지만 떨어질 때는 한 순간에 툭, 떨어지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권력의 된서리로 자신의 관직이 날아가고, 불호령에 감투가 떨어져나가는 모습이 연상되어서라고 한다. 한순간에 추락하는 상상은 끔찍할 것이다. 그런 발상을 하는 것은 틀림없이 부정부패를 일삼아온 탐관오리일 것이다.

아름다운 꽃도 보는 이에 따라 연상되는 것이 다르다.

나는 능소화를 보면 안젤리나 졸리의 입술을 떠올리는데, 감투가 벗겨져나가는 모습을 연상하다니 오, 불쌍할진저!

 

몰락한 권세의 비참한 말로(末路)를 지켜볼 때마다 권력의 끝이 좋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정권의 꼭대기에 앉았던 사람들 중에 파탄지경에 이르러 목숨까지도 몰수당하는 것도 심심찮게 본다. 보면서 우리는 새삼 권력의 비참한 끝, 삶의 초라한 끝, 그 허망함을 각인하게 된다. 더구나 권좌에 앉았던 당사자로서 더더욱 등골이 오싹하지 않았을까? 담장 높은 연희동 자택에서 백담사의 옹색하였으나 누추하지 않았던 방 한 칸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그때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는 아직도 헛살고 있다.

삶의 마지막 부분을 정갈하게 다스릴 수는 없을까.

 

여름이 한창인 백담사 뜰 어디엔가 지금도 능소화가 피어 깨끗하게 내려놓음을 설법하고 있으리라. 연희동 자택엔 능소화가 없을까? 심지 않았을까? 진즉 배어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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