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깜박병엔 수다도 깜짝 효과

천마리학 2013. 8. 27. 13:08

 

 

깜박병엔 수다도 깜짝 효과 * 權 千 鶴

 

 

2월 어느 날이었다. 늘 시간 없다는 이유로 못하고 있던 영어공부를 좀 시작해볼까 해서YMCA에 테스트를 받으러 갔다.

레벨테스트를 마치고 나에게 맞는 시간과 장소 등을 고르느라고 링크스쿨에 대한 정보를 주던 자원봉사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서툴게 나누다가 뜻밖의 정보를 얻었다. 뭐 도움이 필요한 거 없느냐고 묻기에 시민권 신청에 대해서 물었다. 묻긴 했지만 사실 그다지 급하거나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에 55세 이상은 이중국적이 허용된다는 말을 들었기에 참고로 들어두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의 영어가 얼마나 소통되는가를 점검해보기 위한 수다였다.

컴퓨터를 두드려보던 그 자원봉사자는 영주권갱신부터 하라고 했다. 뜻밖의 정보였다.

영주권갱신 가능기간이 5월이므로 지금부터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 시민권신청을 하면 굳이 영주권을 갱신이 필요 없지 않느냐고 되물었더니, 시민권취득신청 처리시간이 보통 2년이 걸리므로 영주권부터 일단 갱신해놓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돌아와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꼼꼼장이 딸도 깜짝 놀라면서 벌써 그렇게 됐나? 하고 그 일을 챙기기 시작했다.

잘 잊어버리는 봄철의 깜빡병엔 별 기대 없이 나눈 수다도 깜짝 효과를 발휘했구나 실감했다.

 

 

장끼와 꿩

 

 

그러던 참에 골프선수 미셀 위(24)가 한국국적을 포기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하와이에서 태어난 그가 20년이 넘도록 지켜오던 국적을 왜 포기했을까 궁금해졌다. 알고보니, 201111일 발효된 국적법에 따른 외국국적 불행사서약 절차를 밟지 않아 미국과 한국 중 한쪽 국적만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개정된 국적법은 미셸 위와 같은 선천적 복수 국적자들은 만 22세가 되기 전 국적을 선택하도록 되어있고, 22세가 되기 전 국내에서 외국 국적을 내세우지 않겠다는 외국국적 불행사 서약서를 쓸 경우 복수 국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고 한다. 미셸 위는 이 절차를 밟지 않아 한국과 미국 국적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복수 국적 대상자에서 제외된 것이다. 그 때문에 한쪽의 국적을 택해야 하는 미셸 위는 주 활동 무대인 미국의 국적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미셸 위가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 국적을 선택했다면 미국 대회를 뛸 때 수시로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등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는 것.

그에게 그렇게 하려는 원래의 다른 의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짐작컨대 골프치기 스케줄에 매달려 바쁜 나머지 그 시기를 깜빡하고 그만 놓친 것 같았다.

 

깜빡!이 문제다.

일상생활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누구나 살다보면 흔히 할 수 있는 실수다.

운전면허 재시험 기간이나, 무슨 무슨 공적 서류의 갱신기간을 깜빡 잊어버리고 넘기기 일쑤다. 재산세니 공과금이니 하는 것을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기한을 잊어버려서, 무심해서 넘기는 수가 더러 있다. 기한을 넘긴다고 해서 꼭 큰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대개 할증요금을 더 무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어쩌다 그러면 몇 푼 안 되는 그 할증요금이 왜 그렇게 아까운지. 아니 그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런 것도 못 챙기며 정신없이 사는 자신에 대한 불만이 더 크게 일어 짜증이 난다.

 

원고청탁을 받고도 그럴 때가 있다. 꼼꼼장이 딸이 일상적인 일을 다 알아서 챙기니까 밀쳐버리고 살지만 원고에 관한 것만은 맡길 수가 없다. 청탁을 받으면 일단 훑어봐서 꼭 줘야할 곳이라면 신경 써서 챙기는데, 내키지 않는 곳은 그냥 버리거나, 메모만 해뒀다가 잊어버리기도 하고 그냥 넘기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청탁의 원고를 깜박하고 잊어버렸다가 마감기한을 넘기거나 다행히 마감기한 임박해서 알게 되면 발등에 불이 난다.

오늘도 청탁 메모를 들춰보며 일의 순서를 정하고 있는데 또 이달의 작가로 선정했다고 자료요청을 해온 청탁의 마감일이 코앞이다. 마무리해야 하는 하던 일도 쌓였는데, ‘나의 문학관 및 걸어온 길’ ‘자선 대표작 10이라니, 바쁘다. 이렇게 설치다보면 또 뭔가 빠트릴 수가 있다. 꼼꼼장이 딸도 영주권갱신기간을 잊고 있었던 걸 보면 누구나 다 그럴 수 있다.

나 역시 꼼꼼히 챙기는 편인데도 가끔 다급해질 때가 있다.

 

 

누구든 앗차! 하는 실수가 없도록 꼼꼼히 챙겨야 할 일이다. 그것이 인생관리이기도 하니까. 갈수록 복잡해지는 생활환경과 스트레스 때문에 건망증이 많아진다고들 하는데, 월간계획표 또는 일일생활기록부 등의 활용이 필요하다. 하다못해 메모라도 해가며 챙겨야한다. 별 생각 없이 그냥 해본 소리였는데 친절한 자원봉사자 덕분에 하마터면 잊고 넘어갈 뻔 했던, 아니면 최소한 기한 임박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서둘렀어야 할 영주권갱신을 기한을 넘기지 않고 느긋하게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별거 아닌 이야기로 얻어낸 정보 덕을 보듯, 때로는 가족 끼리든 친구 끼리든 가벼운 수다도 떨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뜻하지 않은 정보도 얻게 될 것 같다.

더구나 지금은 몸도 마음도 느른해지는 봄날이다. 깜박병은 봄에 도진다. 깜빡 해놓고 애먼 치매를 들먹이고 나이 탓을 하기 일쑤다. 뇌세포가 어떻고 기억력 감퇴가 어떻고 하면서 자꾸만 스스로를 중증 환자 쪽으로 몰아붙이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그래봤자 소득은 없다. 깜박병은 치매도 아니고 건망증도 아니다. 건망증이라고 우긴다면 아주 짧은 순간건망증이라고나 할까? 조금만 정신을 차리면 거뜬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바로 그 순간건망증을 해소하는데 때로는 수다도 약이 된다는 사실을 가정상비약처럼 챙기기 바란다.

어차피 온갖 꽃들이 불어오는 봄바람에 간지럼을 타며 웃어 제치는 봄날, 허심탄회하게 웃어 제치며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훌훌 무게 없는 수다를 떨어봄직 하지 않은가. 하다못해 유머라도 챙겨 주변을 웃기다보면 어느 구석에선가 굳어있던 마음의 근육도 풀리고 솔솔 피로도 풀려 잊고 있던 일도 생각나고, 또 서로 생각나게 해주며 더 웃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두들 깜박깜박하는 하지 않도록 깜박 정신을 차려서 사소해 보이는 일상부터 챙겨야 비로소 봄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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