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시 '춘분'과 입춘편지

천마리학 2013. 8. 21. 10:32

춘분

 

 

봄이면

눈이 없어도

눈 뜰 줄 아는 나무처럼

 

땅심 깊숙이 물관부를 열고

투명한 물길을 여는 나무처럼

 

먼 가지 끝 잎새까지 초록등불 밝히는

마음의 눈을 가진 나무처럼

눈 감고 있으면서

속 눈 틔우는 나무처럼

 

실버들 가지 연두 빛으로

몸 트기 시작하는 춘분 때 쯤

환절기의 몸살감기를 앓는

내 삶의 낮과 밤

일교차 심한 봄추위 속에서

어느 새 새 촉을 뽑아 올리며

푸릇푸릇 몸을 튼다

 

      

 

 

어치

 

 

 

입춘편지, 시와 함께 * 權 千 鶴

 

 

 

벌써 입춘이라니, 너무합니다!^*^

우린 지금 이렇게나 빠른 위성에 탑승하고 있답니다. 잊지 마세요.

건강, 여전 하시지요?

 

오늘 아침에 받은 마음과 마음이 만날 때라는 제목으로 나의 팬으로부터 받은 메일에 즉석에서 써 보낸, 될 수 있는 한 담백해지려고 노력해서 쓴 나의 답 메일이다.

 

안녕하세요!’로 시작된 그 메일에는

계사년의 12분의 1은 벌써 지나갔습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린 모자란 달 2월 초하루였지요.

입춘을 사흘 앞둔 비였기에 봄비인줄 알았더니 그건 봄비가 아닌 겨울비였어요.

하루 지난 오늘은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고, 일요일인 내일 오후부터는 전국대부분지역에 눈 소식이 있고, 중부지방과 경북북부내륙지방을 중심으로 많은 눈이 내린다는 예보이니 말입니다.

해마다 입춘 무렵이면 입춘추위가 따르는데 금년에도 예외는 아닐 듯 싶습니다.

아직 한 발을 걸쳐놓은 겨울의 싸늘한 입김 속에서도 멀리서 손짓하는 새 봄의 부푼 기대는 하루 하루 커져만 갑니다.

다가오는 입춘추위 거뜬하게 이기시고……

 

이렇게 이어진 편지는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기를 기원한다는 말로 마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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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은 4년 쯤 전, 나의 시를 읽고 나의 팬이 된 분이다. 이처럼 독자와 시인의 관계로 몇면 독자가 있는데, 이분에겐 늘 마음이 쓰인다. 단순히 나의 팬이라는 이유만이 아니라 지금 이 분은 암과 투쟁을 하고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동안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알게 된 내용으로는 학교선생님으로 오래 봉직하신 분이고, 몇 년 전에 암 선고를 받고 도시생활도, 정년을 코앞에 둔 직장도 모두 그만 두고 지금 노모(老母)와 함께 공기 좋고 물 맑은 시골 고향으로 거처를 옮겨 전원생활을 하며, 가벼운 농사(農事) 노동을 하면서 투병을 하고 있다는 것, 여러 가지로 미루어 어쩌면 내 또래의 연령이 아닌가 짐작만 하고 있다.

 

그동안 크고 작은 일상사를 비롯하여 계절의 변화, 날씨이야기, 참깨며 콩이며 건강을 위한 노동으로 얻어진 수확물 등을 이분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그때그때마다 적당한 내용으로 답을 보내면서도 나는 다만 그분의 병세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고, 그러려면 그분의 마음이 평안을 유지해야하기 때문에 편안하도록, 그리고 용기 잃지 않도록 단어 하나 글 한 줄에도 신경 써서 보내는 일 외엔 내가 하는 일은 없다.

 

한 동안 병세가 악화된듯하여 두려워하실 때, 설령 죽음에 이르더라도 담담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내 딴엔 마음을 써서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정말 나의 온 마음을 실어서 써 보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엔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에게 과연 위안이 될까? 나의 글과 말이 얼마나 힘이 될까. 가슴 떨리고, 죄송하고, 반성하기를 여러 차례, 이 얼마나 가당치않은 짓인가? 생각했다.

 

크든 작든 모든 일에는 당사자만큼 절실한 사람은 없다. 아무리 곁에서 걱정을 해도 당사자의 복잡한 마음과 고민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기쁜 일이라면 모르지만 좋지 않은 일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하물며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 앞에서야 더 말해 무엇 하랴.

지난 연말에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서 그 동안의 과정을 검사하는 정기검진 예약이 되었을 때다. 그 날짜를 앞두고 초조한 마음을 보내왔을 땐 무슨 말로 위로해드려야 할지, 병원 가는 일이 두렵다고 하시는 그 말씀을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표현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두려움 없이 병원에 가도록 할까, 만약 병원에서 더 악화되었다는 말을 듣게 될 경우 어떻게 대비하도록 할까, 전전긍긍하면서 어렵게 어렵게 되지도 않을 답을 보내놓고 하루하루 초조하게 답을 기다렸다.

검진일이 지난 지 사흘이 되어도 소식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해 내가 먼저, 잘 다녀오셨지요? 하고 메일을 보내었다. 사실 그 메일을 보내면서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 소식이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닥쳤을 수도 있고, 만약 그렇다면 나에게 소식을 전해줄 아무도 없이 그냥 끊어지고 말 상황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의사로부터 특별한 진전도 특별한 후퇴징후도 없으니 계속 약을 복용하며 노력하라는 말을 듣고, 다음 검진을 예약하고 막 돌아와 쉬는 참이라는 답이 왔다.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환호성이 나왔다.

그렇게 그분과 나 사이엔 지금 특별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오늘 아침, 메일을 받고 다시 한 번 빠르게 흐르는 시간과 건강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마음과 마음이 만날 때라는 말이 파고들었다. 아직은 겨울이 성성하지만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따뜻함이 있어 얼마나 좋은가. 모든 일에 마음과 마음이 만난다면 풀리지 않을 게 뭔가. 엉킨 실타래, 잘못 맺어진 매듭, 힘든 고비, 불편한 불화 등등 염려할 게 못 된다. 단지 죽음만 뺀다면.

아직은 올 해의 시작점에서 가깝지만 너무나 빠르게 흐르는 세월을 감안해가며 혹시 그런 징조가 보인다면, 그런 증상이 있다면 빨리 마음과 마음의 끈을 잡고 대처해야 할 일이다. 그리하여, 길건 짧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충분히 소유(所有)하여야 한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그리고 그 분 외의 또 다른 독자들, 주변의 모든 분들이 다 함께 건강한 봄기운으로 삶이 나날이 밝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입춘편지를 쓴다. 다시 한 번, 투병 중이거나 건강하시거나 한 모든 분들, 특히 투병중인 그분께 온몸에 밝고 맑은 기운의 새싹이 돋는 입춘을 맞이하시도록 간절히 기구(祈求)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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