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노인동사-남의 일 같지 않았다.

천마리학 2013. 8. 19. 23:33

 

 

남의 일 같지 않았다 * 權 千 鶴

 

 

 

13, 자식에게 부담 안주려고 엄동설한에 보일러를 켜지 않고 주무시다가 동사(凍死)한 광주의 79세 할머니의 소식을 듣는 순간, 충분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슬픈 공감과 함께, 곧 나의 일처럼, 어제 일처럼 떠올라 또 다시 늑골이 짜르르 조여 왔다.

바로 내가 겪은 일이기 때문이다. 나 말고 수많은 자식들,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자식들 대부분이 겪는 일일 것이다.

큰아들이 채워준 기름 가득한 보일러를 두고 저체온증으로 돌아가시다니. 밑반찬 만들어오겠다고 전날 전화해온 둘째딸을 다음날 말없이 굳어진 몸으로 맞이하시다니. 그 회한(悔恨)이 어떨까.

늑골을 조이다 못해 콕콕 찔러대는 통증이 왔다. 즉시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날씨 춥다면서요? 제발 집안을 따뜻하게 해놓고 계세요.”

넌 어떠냐? 우리는 괜찮으니까 우리걱정 말고 너나 몸조심하여라. 언제 올래?”

헛 메아리처럼 되레 내가 더 걱정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에 반복되던 속 터지는 대답만 들어야하는 나는 여전히 죄인일 수밖에 없다.

모시고 살기는커녕 지금은 이렇게 먼 곳까지 떠나와 살고 있으니, 낼모레면 칠순이 되는 내가 구순(九巡)의 부모님으로부터 아직도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니. 입이 열 개이고, 바작만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래서 늘 부모는 부모고 자식은 자식이다.

 

 

 

 

십여 년 전인가? 석유 값이 폭등할 때였다. 그땐 내가 한국에 있을 때로, 가까이 살고 있었다. 그 해 겨울, 보일러에 석유를 가득 채워드리면서 제발 따뜻하게 좀 지내세요 돈 걱정하지마시구요 하고 당부했지만 부모님 댁의 겨울은 여전히 싸늘했다. 더구나 아들과 딸의 구별인식이 뚜렷하고 강하신 우리 부모님. 차별이나 편애도 심하셨지만 딸자식의 도움을 더더욱 거북해하셨다. 아들 딸 차별 때문에 알게 모르게 불평하면 언제 그랬느냐고 되레 호통을 치시니 우리집 딸들은 늘 야단만 맞았다. 당신들 의식 속에 편애한다고 당신들이 인정하지 않는 한 우리의 불평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 속에서 불만도 불평도 쌓이고 또 그러면서 제풀에 식기도 하고 상처도 많이 입으면서 넘어갔다.

겨울철 보일러사용에서도 아들딸 차별이 드러나곤 했다. 어쩌다 아들내외나 손자들이 온다고 하면 보일러를 따끈하게 올려 집안에서도 훈훈할 정도였다. 신문날 일이네 하고 빈정대기도 했으나 엄마의 눈흘김에 그도 곧 스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딸들이 온다면 보일러는 냉냉 하다. 외손자들이 더불어 오는 날에는 부모님 표현대로 죽은 사람 콧김 만큼이다. 큰딸이라서 딸 중에서도 가장 위세가 있는 나마저도 아들네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날을 제외하고는 부모님 집에 가서 훈훈해 본 일이 없다. 아마도 큰딸인 내가 이물 없어서 그렇구나 하고 이해하며 덮어가지 시작한 것은 나중일이다.

 

겨울만 문제 되는 것이 아니다. 겨울 추위만큼이나 여름 더위도 문제지만, 언제나 선풍기 한 대면 해결이다. 내가 이곳 토론토에 와서 살기 시작한 지 두어 해 되었을 때다. 여름이 오기도 전에 한국의 폭염이 예보되기에 마침 삼성전자에 다니는 친구의 아들에게 부탁해서 에어컨 설치를 해드렸다. 설치를 마친 후 국제전화로 제발 시원하게 지내시라고 당부당부했다. 그러나 그 여름, 아버지의 87세의 생신 때 참석하지 못하고 이곳에 있어야하는 나는 동생들에게 전화로 소식을 전해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날 딱 하루 에어컨을 가동했다는 것이다. 설치 후 가동도 하지 않고 있어서 마침 그런 설비에 대해서 잘 아는 사촌이 있었기에 손을 보고 가동을 했던 것.

부모님들은 다 그러신다. 절략생활에도 익숙하시고 절략의 생활태도가 몸에 배어서도 낭비는 곧 폐악(廢惡)이라고 여기신다. 그런데다 자식들에게 부담지우는 것이 미안해서 피나게 아끼신다.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 나는 늘 부모님 가까이에서 살았다. 생활에 쫒기다보니 자주 찾아뵙지는 못해도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씩은 갔다. 그날 갔다가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거의 대개는 부모님 댁에서 자곤 했다. 나는 하나 있는 딸아이도 외국으로 유학을 보냈겠다,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들 딸 차별이 심해도 가장 흉허물 없이 대화하는 것은 역시 큰딸인 나다. 부모님이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들네일망정 당장 그때그때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도 나,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바로 해결에 앞장서는 것도 나, 부모님께 무슨 일이 생기면 가정 먼저 나에게 알려오기도 했다. 그래서 큰딸이라는 것을 살아가면서 실감하기도 한다. 나는 부모님 집에 갈 때마다 하다못해 유머 몇 가지씩이라도 준비해간다. 그래서 나만 가면 우리 집은 웃음으로 왁자하다. 가족들이 모였을 때도 그렇지만 평소에 부모님만 단출하게 계실 땐 뭐 그리 웃을 일이 있을까. 해서 나는 유머로 웃기기도 하고 아이처럼 너스레도 떨면서 엄마아빠를 웃겨드리곤 했다. 그래서 항상 말씀하셨다. 큰애가 와야 웃는다고. 그런데 지금은 가장 멀리 살고 있다.

 

처음 토론토로 떠나올 때 공항에서였다. 접수대를 통과하면서 울컥, 눈물을 쏟고 말았다. 늙은 부모님을 두고 먼 나라고 떠나다니. 이래서 아들보다 못한 딸인가. 편애(偏愛) 당해도 싸다! 첫 손자가 태어나는 것에 맞춰서 떠나면서 내리사랑이란 말로 정당화하다니, 이런 가증스러운 위선덩어리! 쏟아지는 눈물을 감당할 수 없었다. 힐끗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함께 살면서 늘 차별대우 받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스러워 했음에도, 그리고 충분한 효도는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죄책감이 아직도 어깨를 누르는데도 막상 떠나려하니 오만가지 죄스런 생각들이 범벅이 되었다.

다음 해에 한국에 다니러 갔다. “네가 떠날 때 이제 다시 너를 볼 수가 있으려나 생각했었다.” 부모님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버지가 나를 품어 안으셨다.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구십이 다 되신 아버지의 힘이 들어가는 팔이 느껴졌다. 내속에서 터지는 울음보를 참았다. 그리고 석 달 후, 다시 떠나올 때 다녀 오겠습니다하고 거실 바닥에 무릎 꿇고 절을 하는데 기어코 울음보가 터졌다. 이를 깨물어도 이빨사이로 흘러나오는 신음 같은 소리를 어쩔 수 없었다. ‘쟤가 왜 이래요’ ‘그러게 말이야적당히 눙치며 주고받는 부모님의 대화 속에 나보다 더 진한 부모님의 눈물이 배어있다는 걸 내가 왜 모를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추호도 내가 부모님께 잘 해드렸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가장 무거운 죄인임을 인정한다. 부모님의 속을 썩혀드린 점에서라면 내가 가장 많이 썩혔고 불평도 더 많이 했다. 하지만 이 기회에 부모님만 자식 걱정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백분의 일도 못 따라갈지언정 자식도 때로는 부모님 걱정을 한다는 것. 그러니 제발 자식들 본심(本心)을 알아주셔서 자식들 돈 들까, 자식들 추울까 걱정하시지 말고 부모님 당신들부터 좀 챙기시라고 하고 싶어서다. 자식 생각해서 아끼고 싶은 마음을 좀 참으시고, 자식 생각해서 최소한 겨울 추위 여름 더위 정도는 따뜻하게, 시원하게 지내주시라고 외치고 싶어서이다.

 

새해 벽두부터 들려온 애달픈 소식에 걱정이 되어 전화를 드렸다가 되레 걱정하시는 부모님의 말씀을 들어야했던 수화기를 아직도 놓지 못하고 있다. 끊어진 송화기 속으로 저의 이 피울음소리를 들으신다면 제발 우리 부모님, 그리고 세상의 모든 부모님. 이 겨울을 좀 따뜻하게 지내주세요. 그것이 우리 자식들 죄목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아시겠어요? 어머님, 아버님들!

'권천학의 수필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지경(瑤池鏡) 대신 만화경(萬華鏡)을  (0) 2013.08.23
시 '춘분'과 입춘편지  (0) 2013.08.21
꿈,도사  (0) 2013.08.13
지팡이 사던 날  (0) 2013.07.17
참 좋은 아침  (0) 2013.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