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지팡이 사던 날

천마리학 2013. 7. 17. 02:11

 

지팡이 사던 날 * 權 千 鶴

 

 

 

지팡이를 사기 위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맞잡은 손바닥에서 아버지의 온기가 나지막하게 전해져왔다. 전처럼 뜨겁지가 않고 그저 여릿한 정도여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버지의 손가락 끝 부분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자세가 불편해지기는 하지만 아버지의 손을 따뜻하게 해드리고 싶어서 아버지의 손가락 끝 부분을 모아잡고 걸었다. 아버지의 걸음걸이가 앞으로 쏟아지듯이 구부정, 자꾸만 빨라지는 걸 느꼈다. 천천히 걸으시라고 했더니 몸이 자꾸만 앞으로 쏠려 넘어질 거 같아서 발을 내딛다보니 그렇게 된다는 것이었다. 또다시 가슴이 먹먹해져온다.

건장하신 체격에 바른 자세, 평생을 절제와 훈련으로 다듬어진 장군(將軍)처럼 가슴 쭉 펴고 반듯하게 걸으시던 아버지. 그 늠름하고 당당하시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버지를 83세의 노인으로 실감해야하는 일이 서러울 뿐이다. 사춘기 무렵, 어머니는 나에게 계집애가 가슴 쭉 펴고 고개 빳빳이 쳐들고 걷는다고, 아버지 닮아서 그렇다고 핀잔 아닌 핀잔을 주기도 했었다. 그런 아버지가 지금은 너무나 달라지셨다.

언제 부턴가 알게 모르게 아버지의 어깨가 기울어져 자세가 틀어지고 있었다. 가슴이 뜨끔뜨끔, 아버지 허리 좀 펴보세요. 왼쪽 어깨를 조금만 올리고 걸어보세요 등 자세를 고쳐 드려보지만 잠시 뿐, 다시 변형된 자세가 되곤 했다. 그때마다 말없이 웃기만 하시는 아버지의 미소가 늘 아리고 축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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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년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활기차셨다. 매일 마을 근처의 산에도 다니시고, 어쩌다 찾아뵙는 일이 뜸하다싶으면 전화를 걸어 넌 뭐가 그리 바빠 얼굴보기 힘드냐? 하고 나무라기도 하셨고, 가끔 어디 구경 가자고도 하시던 아버지셨는데 언제부턴가 음식을 드시면서도 별맛을 모르겠다고 하셨고, 귀찮아서 집에 있겠다고 외출이나 소풍을 사양하시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 때마다 다시 한 번 드셔보세요. 거기 가면 아버지 좋아하시는 거 있는데……. 어리광처럼 떼쓰듯이 해보지만 그저 손사래를 치실뿐, 아버지의 스산함에 이르지 못하는 너스레가 되곤 했다.

 

며칠 전, 부모님을 뵈러 갔던 날, 아버지께서 처음으로 지팡이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순간 가슴 속에서 쿵,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못들을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모른 척 하고 싶었다. 근래에 와서 확연히 왜소해진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리고 조마조마해오던 터였는데 지팡이가 필요하시다니. 감지하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외면하려고만 했던 사실을 더 이상 모르쇠로 넘길 수가 없었다. 곁에 계시던 어머니께서 딸에게 부담되는 것이 미안해서 신발장 안에 있는 거 쓰지 그러느냐고 한 마디 거드셨다. 아버지께서는 그건 짧아서 안 된다고 하시면서 친구분들이 사용하는 여러 종류의 지팡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지만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심각해하는 기색을 보이고 싶지 않아 되도록 가벼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행동하느라고 어색하고 힘들었다. 그리고는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문을 닫은 가게들이 많을 테니까 다른 날 기회 봐서 알아보겠다는 말로 적당히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날도 자고 가거라 하셨다. 붙들리는 척 했지만 사실은 늘 그래왔기 때문에 가면 으레 자고 오는 걸로 사전에 작정되어있다. 저녁식사 시간이면 나는 또 과식을 하고 만다. 당신들의 밥그릇보다 먼저 내 밥그릇을 챙기시는 어머니 아버지 때문이다. 더 먹어라, 더 먹어라 하시며 내가 펼치는 우스개로 세 식구가 마주앉은 저녁 식사시간은 언제나 왁자한 웃음꽃이다. 우리 집에서 식구들을 웃기는 사람은 언제나 나다. 그래서 항상 어머니 아버지는 큰애가 와야 웃는다고 말씀하시기도 한다. 난 부모님 댁에 갈 때면 일부러 들려드릴 유머를 미리 머릿속에 담아가곤 한다.

잠자리에 들 시간. 늘 그래 오셨던 것처럼 아버지께서는 당신께서 쓰시는 사우나 침대를 어머니와 나에게 내어주시고 당신은 침대 옆 바닥에 자리를 펴고 주무셨다. 고시랑고시랑 나는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새 아버지의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어머니의 달그락거리는 아침준비 소리를 들으며 선잠에 빠져있는 침대 맡에 오셔서 아버지가 소곤거리신다. ‘얘 빨리 일어나 물 식기 전에 세수해라. 엄마가 벌써 아침 준비 다 해 간다.’ 평소에 지독한 절약습관이 몸에 밴 어머니아버지는 자식들만 오면 보일러를 올려 물을 데워 놓으신다. 정작 나이 드신 당신들만 계실 때는 전기요금을 아끼시느라고 보일러를 켜지 않고 춥게 지내시면서 다 큰 자식들, 다들 중년을 넘긴 자식들이나 손자손녀들이 올 때면 보일러를 올려서 집안이 훈훈해진다. 그것 때문에도 나는 가끔 어머니아버지에게 짜증을 내곤 했다. 제발 그러지 마시라구요. 펑펑 쓰세요. 석유 값 걱정 마시라니까요 하고. 하지만 소용이 없다. 그 아침에도 육십이 코앞인 이 딸을 위해 따뜻한 세숫물을 받아놓으시는 아버지께 나 역시 늘 그렇듯, 마지못한 척 아빠, 전 겨울에도 찬물 쓰는데 괜히 걱정하셔하고 궁시렁궁시렁, 목욕실로 들어갔지만 따뜻한 세숫물에 아버지를 느끼며 흐르는 눈물을 소리 죽여 씻어내려야 했다.

 

 

 

 

어려서는 네 다리로, 젊어서는 두 다리로, 늙어서는 세 다리로 걷는 게 뭘까? 젊어서는 파란 주머니에 은돈 열 냥, 늙어서는 빨간 주머니에 금돈 열 냥 가진 게 뭐지? 아버지가 들려주시는 수수께끼에 그게 뭘까? 헤매다가 답을 맞히면 목마를 태워주시곤 했던 아버지. 한가로운 저녁이면 손 모양을 이리저리 맞추어서 벽 위에 그림자를 만들어 보여주시기도 했었다. 호롱불빛에 만들어지는 컹컹 짓는 개모양이며 깡총 토끼, 기러기 훨훨, 그게 얼마나 신기했던지…… . 아버지!

더 이상 허물어지시면 안 됩니다 아버지. 그 동안 당신은 자식들의 바람막이였고 든든한 기둥이셨습니다. 때론 회초리셨습니다. 지금도 당신은 주머니에 금돈 열 냥 대신 자식들에 대한 염려 열 냥을 넣고 계십니다. 그러나 제 주머니엔 당신에겐 아무 힘도 되지 못하는 걱정과 욕심들만 가득 들어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제가 당신의 든든한 지팡이가 될 수 있을까요? 회초리보다 더 큰 몽둥이로 아프게 패 주십시오. 아버지!

당신의 그 깊고 깊은 은혜를 백분의 일만큼이라도 갚을 기회를 주십시오. 아버지! 더 이상 허물어지시면 안 됩니다 제발! 아버지!

 

며칠 후, 날 잡아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시고 백화점에서 아버지 마음에 드는 지팡이를 고르는 동안 내내 가슴 속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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