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꿈,도사

천마리학 2013. 8. 13. 02:49

 

, 도사 * 權 千 鶴

 

 

 

축구월드스타 박지성은 나의 연하의 연인이었다. 우연히 만나 나에게 빠져든 그는 삼십년이 넘는 연령 차이를 거뜬하게 뛰어넘어 지극정성으로 나를 따르고 아껴주었다. 그날도 데이트 약속으로 나에게 오고 있는 그를 기다리며 친구와 산책 중이었다. 연하의 연인이야기를 자랑삼아 하며 거닐다가 발을 헛디뎌 아슬아슬 절벽 같은 곳에 매달리게 되었다. 모두들 구하려고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아 간당간당 애가 타는데 바람처럼 도착한 그가 나를 끌어올려 위기에서 벗어났다. 마치 올리브를 구하는 뽀빠이와 같았다. 연인에게 이끌려 올라올 때 얼마나 달콤했는지, ! , 꿈이구나! 아쉬워라!

이게 꿈이 아니라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꿈속의 달콤한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은 아침, 뉴스검색에서 박지성의 소속팀인 퀸즈파크레인저스(QPR) vs 첼시의 경기에서 1:0으로 이겼다는 소식이 눈에 들어왔다. 곁들여진 사진엔 꿈에서처럼 흰 바탕에 청색의 굵은 줄무늬가 가로 들어간 유니폼을 입고 뛰는 날렵한 모습 그대로였다. 이 뉴스를 접하려고 그런 꿈을 꾸었나? 웃음이 나왔다.

 

나이 들어가면서 꿈이 줄어들었다. 한 동안 꿈이 없이 살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드문드문 다시 꾸어졌다. 드문드문 꾸어지는 꿈이 거의 다 적중했다. 작년 9월 어느 날, 뜻밖에 꾸어진 꿈으로 한국에 있는 큰조카 며느리의 임신소식도 맞혔다. 태몽이라고 했다.

 

 

불칸(Magnolia Vulcan)-1990년 뉴질랜드의 Mark Jury 농장에서 접목묘로 수입

 

 

 

꿈은 흑백이라는 설()과 달리 나는 어려서부터 총천연색 꿈을 꾸었다. 꿈이 색다른 것을 안 것은 사춘기 무렵이다. 친구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면 이상하다고들 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초록색 잔디, 빨간 고추, 황금색이 도는 금붕어, 포도넝쿨 드리워진 그리스풍의 보라색 얼음건물, 뱅골산 줄무늬의 호랑이, 울긋불긋 꽃들이 만발한 장미정원…… , 색깔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나의 꿈.

유난히 화려하고 장편(長篇)인 것도 특징이다. 꿈을 연속으로 꾸기도 하고 같은 내용을 일정기간 반복해서 꾸기도 했다. 장편 꿈은 시리즈로 연재하듯 서너 번에 걸쳐 마치 연재소설처럼 진행되었다. 영화를 보는 것 같다. 반복해서 꾸기도 한다. 길이만 약간 차이가 날뿐 같은 내용으로 일정 기간 동안 반복해서 꾸었던 어릴 때의 꿈 두어 가지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꿈이 잘 꾸어지거나, 꾸어지는 꿈에 매달리는 시기가 따로 있는 듯하다. 나는 사실 꿈에 매달리는 부류가 아니다. 꿈은 꿈, 곧 잊어버린다. 의도적으로 묵살해버릴 때가 많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끔 꿈이 현실과 맞는 경험도 더러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꿈은 정신적으로 매우 힘들 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개꿈은 아니라하더라도 정신적 도피처로 꾸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살아가면서 꿈꾸는 일도 한 때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꿈이 점점 드물어지고 어쩌다 꿈을 꾸어도 아침이면 다 잊어버리곤 했다. 그러다가 근래에 다시 드문드문 꾸기 시작한 꿈이 현실로 맞아지는 것 같아 신기하다.

지난 10월 어느 날에도 꿈을 꾸었다. 몇몇 관람객들과 함께 우리 안동 권 씨 문중의 어느 고가(古家)를 구경하고 있었다.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고가를 우리 문중에서도 의식이 별로 깨어나지 않은 가계(家系)의 후손이 전수받아 살기 때문에 높은 문화재적 가치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을 마음속에 품은 상태에서 그 집을 세밀하게 구경하는 상황이 꿈속의 현실이었다. 오래된 기둥을 귀한 보물처럼 어루만지고, 때 묻은 벽을 쓰다듬고, 여기저기 허술하게 내 걸린 주렴들의 글귀를 해석하여 설명해주며 일행을 리드하여 회랑(回廊)을 돌고 있는데 갑자기 박정희 대통령이 나타났다. 오랜 지우(知友)처럼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빙그레 웃었다. 나 역시 반가워서 어떻게 지내셨어요? 걱정되시지요?’ 하고 건네는 말에 연민이 묻어남을 나 스스로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걱정 마세요, 도와주세요하는 말까지 하고 헤어진 순간 내 부모님을 바친 조국! 나도 바치겠습니다!’ 하는 문구가 떠올랐다. 박근혜에게 이 문구를 연설문에 넣으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회랑을 돌아 무심코 창문을 열었다. 거기 펼쳐진 북한산. 흰 바위를 배경으로 7부 능선까지 새빨갛게 타오르는 단풍이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답던지, 실제로 보고 감탄했던 알공퀸이나 버몬트의 가을풍경보다 더 아름다워서 아! 농도 짙은 감탄사가 절로 나왔고 온몸이 기쁨으로 가득 차올랐다. 차오르는 기분 그대로 깨어났다. 깨어서도 꿈속의 풍경이 선명했고 그 기분 좋음이 며칠을 갔다. 신기했다.

 

그 꿈이 무슨 뜻일까 궁금했다. 그 무렵 안철수가 출마선언을 하느니 마느니 할 때였고, 나는 안철수가 정치에 끼어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이전에 <철수야 놀자!>라는 칼럼을 쓰기도 했었다. 그러던 차에 그런 꿈을 꾸었으니 그 꿈의 의미가 더욱 궁금해서 친구에게 이야기 했다. 박근혜가 당선될 모양이지, 툭 던졌다.

 

 

그 무렵 나는 연이은 감기와 누적된 피로로 몸이 지쳐 힘들게 보내면서도 거의 매일 글 폭포 쏟아지듯, 오륙십 매씩의 원고를 써대고 있었으니 피로가 가실 틈이 없었다. 지친 탓인지 가끔 우울해지기도 하는 상황을 그 꿈과 연결시키고 있었다. 그러면서 퍼뜩 떠오른 생각, 내가 곧 죽으려나? 하는 것이었다.

우리 문중의 고가가 보였고, 창밖의 가을 풍경이 눈물 나도록 아름다웠고, 이미 죽은 박정희 대통령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긴 나는 김대중, 김영삼, 이명박대통령까지 꿈에서 만나본 일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모두 살아있는 대통령들일 때였다.

내색은 안했지만 한 번 그 생각을 하니 허무하고 억울하고…… 주변정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치달았다. 복잡한 심경으로 가닥을 잡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는 동안 엎치락뒤치락 하던 대통령선거도 박근혜가 당선, 짤막하게 던진 친구의 해몽이 맞았고, 비로소 내가 곧 죽으려나 하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엔 스포츠엔 전혀 관심도 없는 나의 꿈에 박지성이 등장하고 이어 그 모습 그대로를 뉴스에서 본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도사(道師)이거나 도사가 되려나보다. 어차피 도사가 되려면 이제부턴, 밤 꿈일망정, 앞으로는 지금까지 이루지 못한 생시의 소망을 이루어내는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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