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눈부처

천마리학 2013. 12. 6. 04:22

 

 

 

눈부처 * 권 천 학

 

 

한 살 반짜리 도리하고 놀고 있으면 그야말로 시간개념도 공간개념도 사라져버린다. 그냥 둥둥, 순진무구한 허공 속을 떠다니듯, 혹은 무게조차도 느껴지지 않는 가볍디가벼운 새털 같은 느낌이랄까 구름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다가 문득 이것이 곧 천상의 삶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늘 시간에 쫒기듯 바쁜 일상을 생각하거나 밀린 일을 생각하면 이내 짜증이 나기오 했다.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 짓인가 해야 할 일은 산더미인데 이렇게 하느적거리며 아기하고 놀고있다니 하면서 초조해지고 그것이 연장되어 다급함이 된다.

아기를 보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몸도 부대껴 힘도 들지만 그보다 더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다. 그것만 벗어던지면 되는데 그것이 어렵다. 그래서 아기 보는 일은 좋아하면서도 부담스러운 일이 되어버리곤 했다. 그러나 사정상 아기를 돌보지 않을 수 없다보니 마치 의무감에서 눈치봐가면서 봐야하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그러다가 점점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어차피 아기를 돌봐야하는 일은 해야 할 일, 기왕 해야 할 일이라면 기분 좋게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모두에게 좋다.

 

 

 

여기까지가 20121111일 토요일 오전에 써둔 부분이었다. 그런데 오늘 다른 원고를 쓰려고 뒤적이다보니 미처 끝내지 못한 글 조각이 튀어나왔다.

눈부처! 맞아, 늘 마음속에 품고 있으면서도 마치지 못한 글이었지, 하고 반갑게, 새삼스럽게 다잡는다. 위 글을 쓸 때 도리는 만 두 살을 코앞에 두었을 때이고 지금은 그 두 살을 막 지나 3개월째 되어가고 있으니 도리가 3개월 더 자란 후이고 따라서 이 글은 3개월 만에 이어 쓰지만, 아리 도리를 보살피면서 서로가 늘 눈부처임을, ‘눈부처이기를 많이 바랐다.

오늘 아침에 도리의 스트롤러를 밀고 가고 로저스 센터 옆의 오르막을 오르고 있었다. 밑으로 고 트레인이 달리는 철길이 있는 다리에 오르기까지 약간의 경사가 오늘 따라 눈이 쌓여 어녹고 있는 상태라서 힘이 들었다. 가다가 멎고 가다가 멎고. 멎어서 쉬기도 하고 도리의 눈물과 콧물을 닦아주기도 한다.

도리, 아저씨 봤어요? 안 봤어요?”

봤어요.”

꼭 이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도리와 내가 나누는 대화다.

아저씨가 몇 명?”

하나아, 두울.”

장갑 속에 들어있는 손가락을 움찔거려가며 세워 보인다. 도리는 한국말을 할 때에 혀를 이 사이에 끼우며 마치 혀 짧은 사람이 말하듯 한다.

로저스 센터 옆, 철로 가에 초기중국이민자들의 철로건설을 기념하는 조각물이 있는데 그 조각물의 아래쪽에 줄을 잡아당기려는 인부 모습의 조각이 있고, 위쪽 높은 부분에 줄을 던져준 인부 모습의 조각이 있다. 그것을 한국말로 아저씨라고 알려준 후로 이 곳을 지나칠 때마다 그런 대화를 나누곤 한다.

아저씨가 어디 있어요?”

데어 에엔, 데어(There and there).” 하면서 윗부분을 가리킨 다음 아래 부분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어서

하이, 에엔 다운(High and down.)”

아하, 그렇구나! 도리가 먼저 아저씨를 발견했구나!”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경사길을 싱글벙글하는 도리의 스트롤러를 밀고 오른다. 그런데 거의 경사를 다 올라올 무렵, 도리의 얼굴을 살피려고 스트롤러를 멈춘다. 한 쪽 발로 바퀴를 고정시킨 다음 도리의 얼굴을 살핀다. 날씨가 추워서 도리의 왼쪽 눈에서 가끔 눈물이 흐르고 코도 흘리기 때문에 닦아주기 위하여 수시로 점검을 해야 한다.

잠간마안!”

도리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주머니에서 화장지를 꺼내고 있는데 빠안히 바라보던 도리가 나의 선그라스의 양쪽 눈을 손가락으로 짚는다.

도리!”

거기에 도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 할머니 눈에 도리가 있지? 그게 눈부처라는 거야. 알겠니 도리? 도리는 할머니의 눈부처야.”

도리가 알아들을 리 없지만 나는 그저 행복하고 뿌듯해서 주고받는다. 도리가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할머니의 심중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이해하리라고 생각한다.^*^

 

눈부처!

눈동자에 비치어 나타난 사람의 형상이라는 뜻의 참 아름다운 우리말이다.

마주 선 상대방의 눈에 비치는 내 모습.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하겠지만, 늘 철철 넘치고 순순한 시적 감성의 소유자인 나로서는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을 끝낼 수는 없다.

얼마나 마주하고 있으면 눈부처가 될까?

설령 얼핏얼핏 비춰질 때만 나타나는 모습이지만 그 모습이 깊이 새겨져 사라지지 않도록 하려면 얼마나 길고 깊은 동행(同行)이어야 할까?

사랑하는 사람에겐 서로가 눈부처이고, 눈부처가 되면 눈을 감아도 떠오를 만큼 각인 되어있다.

 

 

 

 

 

 

한 시절, 내가 누군가의 눈부처이고 싶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하던 때가 있었다. 또 누군가가 나의 눈부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살벌하고 위태롭고 허망한 세상살이에서 서로가 눈부처가 된다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늘 생각했다.

 

하머니이

도리가 내 눈 속을 말갛게 들여다보다가 손가락으로 내 눈을 찌르듯 가리킨다. 그 말이 어찌나 듣기 좋은지, 이거야말로 천상의 언어가 아닐까. 마음이 들떠서 할머니 눈에 있는 도리, 도리가 보여? 하면 여기하면서 다시 나의 눈동자를 찌를 듯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래 도리야, 할머니 눈 속에 도리가 보이지? 도리 눈 속엔 할머니가 있단다.

도리가 알아들을 리 없건만 나는 흥분하고, 도리는 신기한 듯 연신 내 눈을 들여다보며 방실거린다. 내가 지금 한 말을 새기듯이. 그래, 우리 서로 눈부처 되자꾸나. 아니, 넌 아니라도 할머니는 기꺼이 너의 눈부처가 되어주마. 속으로 다짐하듯 뇌인다. 마음이 뜨거워진다.

 

도리는 지금 서툴게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영어야 물론이지만 제 아빠와는 불어로 소통을 시작하고 할머니인 나와는 한국말을 가르치고 있다. 어렵사리 한 단어씩 배워가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아름다운 관계, 아름다운 단어까지 새기게 되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꽃이 나의 눈부처이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들여다보고 있으면 서로가 눈부처이다.

새끼를 낳아 기르고, 새끼가 또 새끼를 낳고, 그 새끼가 또 ……

지금 나는 새끼의 새끼를 눈 속에 심어 눈부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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