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더는 늙지마라

천마리학 2013. 11. 29. 04:24

 

 

 

 

더는 늙지 마라 * 권 천 학

 

 

얼마 전 한국의 모 시청에서 발행하는 기관지로부터 원고를 청탁받아 보냈다. 나의 사진과 함께 실린 그 글을 어머니 아버지께서 보신 모양이었다. 안부를 여쭙는 국제전화를 걸었을 때 전화를 받으신 아버지께서 말씀 하셨다. ‘네 글이 나왔더구나. 잘 읽었다.’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겸연쩍은 마음으로 그러셨어요?’ 하며 이야기를 이었다. ‘그런데 네 사진을 보고 엄마는 네가 너무 늙었다고 걱정이……하고 말씀하시는 아버지로부터 뺏다시피 한 송화기 속에서 대뜸 , 너무 늙었더라.’ 어머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살기 좋은 곳에 갔으니……하시며 미처 아버지가 꺼내지 못 하신 말씀을 쏟아내셨다. ‘아기들에게만 매달리지 말고, 몸단장도 좀 해가면서, 훌훌 여행도 다니고……이어지는 말씀은 꾸중 아닌 꾸중으로 바뀌었다. 큰손자 아리가 태어나던 해에 캐나다에 와서 손자를 돌보며 살기 시작한 후 가끔, 국제통화를 할 때마다 들어오던 꾸중이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아버지께서나 건강하시고…… 어머니의 염려를 줄여드리려고 적당히 피하며 이어나가던 대화는,

……이제 더는 늙지 마라!’

어머니의 한탄과 호통이 섞인 그 한 마디로 끝이 났다.

국제전화선에 쩌르르 감전당한 느낌으로 수화기를 내려놓고도 한동안 먹먹했다. 어머니의 그 한 마디는 가슴을 치밀고 올라와 이내 눈가를 적셨다. 다른 몇몇 지인들은 글 잘 읽었다고, 멀리서도 여전하더라고 반가운 말들을 전해왔지만, 부모님 눈은 글의 내용보다는 사진 속 자식의 모습을 먼저 읽어내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모님의 마음이다.

 

 

 

 

 

 

나의 어머니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어머니들과는 좀 다르다. 말수가 적고 은근히 매우셔서 어떤 면으로는 아버지보다 더 무섭게 느껴지는 분이시다. 매우 이지적이랄까. 객관적이어서 그 연세의 또래세대와는 의식이나 생각이 많이 다르시다. 한번은 어머니와 함께 아파트 내 상가에 있는 비디오 가게에 비디오를 빌리러 갔었다. 비디오를 고르시는 어머니를 향해서 비디오가게의 청년이 할머니, 포청천이요?’ 했다. ‘포청천이 한창 인기를 끌 때였다. 고개를 저으시면서 계속 꽂혀있는 비디오들을 살피시자 이번엔 그럼 전설 따라요?’ 했다. ‘내가 어린애로 보여요?’ 생각 밖의 반응에 뜨악해진 청년이 머쓱해져서 요즘 그게 인기거든요.’ 하다가 어머니가 뽑아들고 나온 비디오를 보고 눈이 커졌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번안한 가시나무 새였다. ‘할머니가 그런 걸 보세요?’ 하고 묻자 왜 내가 보면 안돼요?’ 하시니…….

어머니는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다. 내가 어렸을 땐 서양사를 이야기하시는 것도 들은 기억이 있지만 후에는 주로 국내역사와 문화혁명 이전의 중국역사였다. 서태후의 섭정이며 당태종의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국내의 사극드라마를 보시면서도 고증이 맞지 않는다거나 사실과 다른 점을 짚어내시며 혀를 차곤 하셨다. 그런 어머니께서 나이가 많아지니 비디오 보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흥미가 없다고 하시는 말씀을 캐나다로 떠나 올 무렵에 들었다. ‘사는 거, 별거 없다. 밤새워 골머리 썩지 말고, 그저 하고 싶은 것 해가며 편케 살아라.’라고. 밤새워 글 쓰고, 책을 놓지 않는 나를 은근히 만류하시기도 했다.

 

잔정이 없는 것도 다른 어머니들과 다른 점이었다. 자식들을 맞이하는 현관에서 한 번도 큰소리로 반가워하며 포옹을 한다거나 넝출한 표정으로 맞이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 오니?’하시며 현관을 들어서서 신발을 벗고 올라설 때까지 지켜봐주시는 것이 최대의 환영이었다.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갈래? 길 조심해라가 다였다. 오면 오는가보다, 가면 가는가보다 하시는 우리 엄마, 참 무정하다! 할 때도 있었다. 오죽하면 내가 사십 무렵에도 친구로부터 혹시 친엄마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을까. 그러나 그것이 우리 어머니 식 사랑법이고 교육이었다는 헤아림을 왜 못하겠는가.

 

 

 

 

 

그런 어머니가 처음으로 엉뚱하게 느껴진 일은 내가 삼십대의 어느 날이었다. 퇴근길에 들렸다. ‘엄마, 나 숏커트 할까?’ 당시에 숏커트가 유행이었다. ‘넌 안 어울려. 지금 그대로 단발형이나 상고머리처럼 이렇게……손으로 머리모양을 지어보이시면서 설명을 하셨다. ‘친구들이 숏커트가 잘 어울릴 거라던데?’ 무심코 던졌다. ‘이 바보야. 네가 예뻐 보일까봐 셈나서 다르게 알려주는 거야.’ 이상하게 바라보는 나에게 한마디 더 얹으셨다. ‘친구들은 언제나 너의 경쟁자야.’ 그때 나는 놀랐다. 늘 원칙만 말씀하시던 어머니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그러나 바로 그 말씀이 세상살이 이치를 가르쳐주신 첫 충고였음을 뒤늦게 알았고, 살아오면서 여러 차례 그 이치를 깊이 실감하는 경험을 했다.

 

생각해보면 잔말이 없어 잔정이 없어보였고, 잔정이 없으니까 냉정해 보였고, 객관적이고 냉철했던 어머니, 그러나 드문 말씀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만은 깊었다. 겉으로는 야박할 정도지만 마음속은 뜨겁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내가 중년을 넘어서면서 부터인 듯하다. 그제야 비로소 철이 들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그토록 꼿꼿하시기만 하던 어머니가 내가 맏이인 탓인지 며느리에게도 다른 형제들에게도 하지 않는 이야기를 모두 나에게 쏟아놓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알쿵달쿵한 시간이 흐르면서 엄마도 여자라는 것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여전히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무서운 존재가 어머니였다. 오십 넘어서도 무슨 일이나 행동에 앞서 늘 부모님을 떠올렸다. 특히 엄마의 나무람이 있지나 않을까 조심하곤 했다. 나에게 어머니는 여전히 냉철한 가늠자였고 단호한 판단자였다.

그런 어머니가 언제부턴가 부쩍 달라지셨다. 어머니의 걱정 포인트가 달라진 것이다. 나에게 늙음이 스미는 것을 지적하시기 시작했다. ‘제발 그 청바지 좀 벗어라, 사치 좀 하고 살아라, 미장원에 좀 다녀라, 밤새워 이름 붙인 글을 쓴다 한들, 모든 것은 눈 깜짝 할 사이다……

오늘도 그 연속선상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허술하다. 머리도 스스로 자르고, 청바지나 즐겨 입고, 편한 대로 살고 있으니, 거기다 흰머리까지 성성하니 얼마나 얄미운 딸인가.

더는 늙지 마라!’

아직도 가슴에서 맴도는 그 호통도 지키지 못할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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