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아름다운 구속, 예절

천마리학 2013. 11. 22. 04:26

 

 

 

아름다운 구속, 예절 * 권 천 학

-어르신과 반바지

 

 

약속한 시간에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저만큼, 먼저 내린 딸 내외와 인사를 나누고 있던 크리스 씨가 아리와 도리를 앞세우며 늦게 차에서 내리는 나를 보고 안녕하세요 어르신? 하면서 다가오더니 어르신 오시는 걸 모르고 반바지를 입어서 죄송합니다, 하고 머리를 숙이며 어색한 몸짓을 한다. 별말씀을, 괜찮아요,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구애 받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 하고 당부 곁들인 대답을 했지만 반바지 입은 것을 결례라고 생각하는 그 말에 생각이 잠시 머물러서 표 나지 않게 머뭇거리는 것은 오히려 나였다.

어른 앞에서 반바지를 입었다고 미안해하는 사람을 얼마 만에 보는가. 요즘 세상에 그것이 생활예절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긴, 나를 직접 대면해서 어르신이라고 지칭한 사람도 크리스 씨가 처음이었다.

 

얼마 전 딸 내외에게 용무가 있어 크리스 씨가 우리집을 방문했었다. 오십 언저리의 크리스 씨는 딸 내외로부터 나를 소개받자 어르신께서 함께 사시는 것을 몰랐습니다, 알았더라면 간단한 선물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하며 쑥스러워 했다. 그때 나는 멈칫했다. 나를 직접 대면해서 어르신이라고 하는 지칭을 처음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어르신? 벌써? 번개처럼 스쳤지만 태연을 가장했다. 안동이며 예천이며 고향 이야기가 잠간 나오고 어렸을 때 이야기, 떠나오기 전 한국에서 살던 때, 이어 토론토에 와서 사는 이야기까지, 떠나와 사노라니 잊고 산다면서 어른에 대한 예우를 갖추려고 하는 모습을 은연중에 보였다.

 

 

 

 

 

 

뭘 좀 아는 사람이더구나. 그날 크리스 씨가 돌아간 후에 내가 딸에게 한 말이다. 아무리 멀리 떠나와 살고 있다고 해도 거쳐 온 옛날을 잊어버릴 수는 없는 법. 살아온 시간의 무늬가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의 언행에 묻어나기 마련이다. 비록 급변하는 세속과 다른 환경에서 사는 일에 익숙해졌어도 잔뼈 굵힌 고향 또는 고국에서의 삶을 잊어버릴 수는 없는 일, 가짜로 흉내 낼 수도 없다. 그래서 바탕은 숨길 수 없다.

 

먼 옛날의 아버지가 생각난다. 어른 앞에선 안경을 끼는 것도 무례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 외에 어른 앞에서 한숨을 쉬어서도 안 되고, 큰소리로 말해도 안 되고, 어름의 물건을 타넘거나 함부로 취급해도 안 되고, 누워계신 어른의 머리맡을 지나가도 안 되고, 어른보다 먼저 수저를 놓아도 안 되고, 말대꾸를 해도 안 되고…… 등등, 일상생활 중에 소소하니 어른 앞에서 지켜야할 규율만도 많았다. 완고하고 고리타분하기 이를 데 없는 집안의 풍속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런 예절들이, 그 마음가짐이 지금까지도 흐뭇하게 느껴지고 그 예절이 살아있던 그 시절이 아름다운 시절이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러니 나는 오래된 사람인가?

 

서른 즈음, 내가 소속된 부서의 장(*)이 어느 날 회의에서 잊혀가던 기억을 되살렸다. 당신의 연구실에 찾아온 한 남학생이 한 손을 뒤로 돌리고 쭈뼛쭈뼛 어름거리기에 이상해서 살펴봤더니 뒤로 돌린 손에 돋보기를 들고 있더라고 했다. 돋보기를 끼고 어른 앞에 서는 것이 결례가 된다는 가르침을 받은 학생이구나 싶어 어깨를 다둑이며 안경을 끼라고 했다면서, 참 오랜만에 배운 집 자제를 만나 기분이 좋더라고 했다. 그때도 나는 잊혀가던 뭔가를 움켜쥐듯, 먼 아버지를 떠올렸었다.

그로부터도 또 사십년 가까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 더욱이 다른 나라에까지 와서 살면서 반바지 입은 것을 죄송해하는 사람을 만날 줄이야. 만나서 새삼스러울 줄이야. 나의 아버지는 여전히 멀고, 나 또한 멀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부모보다 먼저 죽는 자식을 가장 큰 불효자로 치는 이유가 부모에게 애간장을 녹이는 슬픔을 안겼다는데 있듯, 어른 앞에서 안경을 끼는 것도 부모로부터 받은 몸을 소중히 간수하지 못해서 어른보다 더 먼저 몸을 망가트렸다는 죄목이고, 반바지 쯤이야 몸을 함부로 드러내지 말라는 뜻이 배어있다. 유교적 사고에서 시작된 인식이라고 내칠 수도 있고, 신체적 불편이나 생리적인 현상까지도 구속받을 이유가 없다고 반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식이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라는 것을 안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예절이란 다소 신체적 불편을 감수하면서 지켜내는데 아름다움이 있다고 이해하게 되면 그것은 곧 죄목이 아니라 덕목이다. 때로는 옛날의 예절들이 타다 만 부지깽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지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아름다운 예절이 되는 것. 곰곰 생각해보면 예절은 지켜져야 하는 구속이 아니라 즐기기 위한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모임의 종류에 따라 갖춰야할 복장이 다르다. 정장을 입을 자리, 파티복을 입을 자리 등등, 분위기가 다르니 입는 옷도 달리한다. 정장을 할 자리에 캐주얼 차림으로 참석한다고 해서 난리가 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모임에 맞는 옷을 입어, 의미도 새기고, 분위기도 만끽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격이다. 그러나 때로는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하고 또 부담스럽거나 거추장스럽게 생각되기도 한다. 지킬 수 없는 상황이야 일시적인 것이지만 부담스럽거나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그 예절에 스며있는 진정한 의미를 모르거나 불편이 커서 그럴 것이다. 의미를 안다면 다소 불편하더라도 지키게 될 것이다. 그것이 곧 분위기를 깨지 않고 격을 갖추는 것이므로 예절은 결국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예절은 아름다운 구속이다.

세상은 빠른 속도로 바뀌어가고 그에 따라 삶의 패턴도 바뀌어간다. 과거의 것이 다 현대에 맞지 않는 것도 아니다. 흐르는 시대에 맞춰 예절도 흘러가야 한다. 과거의 것이라는 이유로 내치기보다는 불편한 점은 고치고 수정 보완해서 더 좋은 현대예절을 만들 수 있다. 사람의 근본이 사라지지 않듯, 사람 사는 이치도 근본적인 바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예절은 타인을 배려하고 공동체 속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하여 자신의 생활에도 윤활유가 되는 예절, 예절은 아름다운 구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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