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성대결-여성의 날에 즈음하여

천마리학 2013. 2. 28. 06:41

 

 

 

성대결

-여성의 날에 즈음하여

 

權 千 鶴

 

 

 

요사이 '월드 넘버 원'에 등극한 골프선수 매킬로이와 샤라포바의 테니스 '성 대결'이라는 제목의 스포츠 뉴스가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플로리다 팜비치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혼다클래식 대회에 참가한 메킬로이가 우승을 차지한 직후에 아직도 남아있는 마이애미의 경기 프로그램 사이의 짧은 시간을 이용하여 뉴욕으로 날아왔다. 맨하탄의 매디슨 스퀘어가든에서 벌어지고 있는 테니스 게임장에 나타났다. 애인인 캐롤라인 워즈니아키와 샤라포바의 테니스이벤트 대회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사랑이란 참 좋은 것이다.

그런데 경기 막간에 샤라포바가 관중석에 있는 중년남자를 불러 춤을 추었다.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입장이 된 워즈니아키가 즉흥적으로 누가 나와 춤 출 사람 있나요?’ 하고 관중석을 향해 말했다. 매킬로이가 손을 들고 나갔다. 그러자 워즈니아키아가 매킬로이의 손에 라켓을 장난삼아 쥐어줬고, 라켓을 받아 쥔 매킬로이는 어쩔 수 없이 골프선수답게 테니스 공을 바닥에 놓고 골프채로 치듯 흉내를 내며 여유를 보이다가 사라포바에게 공을 날렸다. 샤라포바 역시 웃으며 주거니 받거니 여덟 번 만에 샤라포바의 범실이 유도되었다. 모두가 재미로 관중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행동들이었다. 일종의 팬 서비스 차원이다.

해프닝이 끝난 후 매킬로이는 자기의 애인 워즈니아키가 다른 남자와 춤을 추는 것이 싫어서 나갔었다고 했다. 역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은 소유다.

그런데 이 내용을 뉴스들은 앞다퉈가며 성대결이라는 단어를 붙여 실어내고 있었다. 매우 선정적이다. 허무하기 짝이 없다. 물론 관심을 끌기 위하여 만들어냈다는 것을 다 안다. 어쨌거나 그 성대결이라는 단어가 오래 전의 기억을 들추었다. 그것은 나 개인적인 기억에 국한되는 것만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의 변천사를 살펴볼 수 있는 역사의 궤적이기도 하다.

 

성대결.

곧 남성과 여성의 대결이다. 대결은 곧 화합의 역설적 표현이기도 한다. 남녀공존의 현실이라는 총론 안에 스며있는 사소한 각론이나 사소한 개론(個論)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전제 하에서 사족(蛇足)의 이야기를 펼쳐보자면, 과연 남성과 여성이 결국 대결의 상대일까? 하루도 빠짐없이 지상에는 온갖 남과 여의 군상(群像)들이 얽혀 빚어내는 벼라별 작태들이 무수히 일어났다 사라지는 물거품 혹은 먼지덩이 같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곤 사라진다.

인류역사상 동시에 출발해서 함께 살아오는 가장 오래된 관계임에도 아직도 대결구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남녀 간의 묘한 관계일 수밖에 없다.

정확한 수치로야 차이가 있긴 하지만 남성과 여성은 지구상의 반반을 서로 차지하고 있으면서 협력하고 공존하는 존재로 세계평화를 유지하고 인류의 본능인 DNA를 이어가고 있다.

남과 여가 반반으로 존재하고, 남과 여가 만나서 가정을 만들고, 성인남녀가 서로 협조하여 이루어지는 공동작업을 통하여 새끼를 만들어 차세대에 이어지는 DNA를 전달할 수 있다. 남과 여를 굳이 구분할 필요 없이 우리의 삶을 생각해보면 명예니 권력이니··· 하지만 결국은 큰 테두리 안에서 보면 남녀 공히 DNA를 전달하는 운반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왜 하늘과 땅으로 구별하고, 영원한 적수처럼 아웅다웅일까. 때로 여자는 새끼 낳는 도구로 격하되기도 하고 남자는 왜 잠시잠깐을 즐기는 쾌락의 카사노바인가.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그러나 심각하지는 않다.

아담의 갈비뼈에서 만들어진 여성.

왜 자기 몸에서 분리된 분신인데도 화합하지 못하는 모순이 아직도 존재할까.

남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머니도 여자이고 아내도 여자이고 딸도 여자이다. 그런데 왜 가정 밖의 여자와 집안의 여자가 구별이 될까. 내 아내와 내 딸은 보호받아야 할 여자이고, 외출중인 여자는 욕망의 대상이거나 부리는 대상이어야 하는가.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낼 때 가슴 아프게 울어놓고 남의 귀한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여서는 구박할까? 내 딸은 공부 잘 해서 사회에서 명망 높은 지위에 있길 바라면서 왜 사회의 명망 높은 여자는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 꼬리를 물고 수다를 떨자면 끝이 없다.

 

고상한 표현이나 학술적인 용어로 표현하는 것조차 불필요한 남녀 간의 묘한 갈등관계는 여전히 이 사회의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전히 성대결이라는 표현되는 것을 보면 세상이 한참 많이 달라졌어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논리이기도 하다.

80년대에 시작된 한국에서 여성의 권리회복운동이 시작되어 불붙던 시절이었다. ‘여성상위시대’ ‘여권운동가’ ‘남녀동등권’··· 등이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고, 그것이 패미니즘으로 이어졌다가 지금은 낡은 잇슈가 되어버린 싯점이다 그만큼 여성의 지위가 확보되었다는 증거다. 여성이 사람이길 원하는 구호가 커졌던 그 시절, 그 와중에도 성대결이 벌어졌었다. 1992년이 일이다.

당시, 체코의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와 네 살 연하인 미국의 지미 코너스의 테니스 게임이 세계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 게임이 일반적으로 겨루는 실력의 우열을 가리는 단순한 테니스 게임과 다른 것은 성대결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점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실력다툼도 아니었다. 여성과 남성의 대결이었다.

그게 어디 꼭 여성과 남성의 대결이었을까. 그저 유명한 남자 테니스 선수와 여자 테니스 선수였을 뿐이고, 꼭 성대결의 목적이나 의도가 아니라 최고의 실력을 겨뤄보자는 게임이었지만 시대적 분위기에 휩쓸린 호사가들이 붙여낸 말이기도 했다. 차라리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쟁이라면 그나마 일반적으로 갖기 쉬운 감정이라고 하겠지만, 성대결이라니. 여성과 남성은 나란히 가는 철길에 비유되듯, 영원히 합일을 이루지 못하는 관계인가.

합일을 이루지 못하는 대신 늘 함께 해야 무슨 일이든 이뤄내고 도착지에 동시에 도착하는 막역한 동지여야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결양상을 띄어야하다니. 역시 인간들의 경쟁심은 어쩔 수 없나보다 하면서 시간보내기로 왈가왈부들 했었다.

1992년의 테니스의 성대결에서는 0:2로 나브라틸로바가 졌지만 그저 그뿐. 그것이 사람들에게 한 순간의 재미꺼리로 지나갔을 뿐이다.

운동경기에서 벌어지는 단순한 성대결은 그래도 즐기기 위한 방편으로 칠 수가 있다. 그러나 성대결이 전적으로 성차별이 되거나 기득권자의 횡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후, 지금까지 사회각 층에서 일어나는 성차별은 다르다. 한순간의 재미나 흥미가 아니다. 여성의 일생을 구렁텅이로 빠트리고, 불행한 삶을 만드는 죄악이다. 여기서부터는 좀 심각해질 필요가 있다.

남성과 여성의 성대결이란 타이틀로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늘어놓긴 했지만, 본론은 여성의 인격모독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다 해당되는 이야기다. 세계의 반반을 구성하고 책임도 반반씩 지으며 살아가는 입장에서 어느 한쪽도 인격적 무시를 당하거나 불평등으로 고통 받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 세계평화이며 인류구원이며 이야기의 결론이다.

불평등이 꼭 여성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 쪽의 확률이 높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물론 그것도 남성위주의 근세역사의 잔재이며, 그로 인한 남성의 기득권이라는 개념으로 성립이 되었고, 남성들은 그 달콤한 기득권을 행사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빚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현실적으로 우리 주변의 남성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럼 남성이 있다면 그는 바로 간 큰 남자이면서 세상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하는 미련곰탱이에 해당하는 극소수일 것이다.

아웅다웅, 그 속에 정이 넘치고 신뢰가 쌓여간다는 것을 잘 안다.

알면서도, 한 마디, 만약 지금도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망상에 사로잡혀있는 남자가 있다거나, 아직도 강보에 쌓인 아기처럼 칭얼칭얼 불평하는 남자가 있다면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람으로 키우는 데 20년이 걸린다. 다른 여자가 그를 바보로 만드는 데에는 20분이면 충분하다.”고 한 헬렌 로랜드의 말을 들려주면서 바보가 되지 말라고, 큰누나처럼, 엄마처럼 알밤 한 대 쥐어박힐 것을 각오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