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춤추는 코끼리도 외롭다* 權 千 鶴

천마리학 2013. 2. 19. 10:02

 

 

 

춤추는 코끼리도 외롭다 * 權 千 鶴

-코식이의 메시지를 받고

 

 

 

코끼리가 또 메시지를 보내왔다. (지난 112일이었다)

말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너무나 외로웠거든요.”

에버랜드의 코끼리 코식이가 나에게 보내온 메시지다. 코식이의 메시지에 잠시 멈춰 서서 생각에 잠겨보는 나는 분명 코끼리종족보다 한 수 위인 영장류 인간이다.

 

그 동안 코끼리는 여러 차례 우리에게 이름을 차용(借用)해주는 도우미 역할을 해왔다. 이를테면 비록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칭찬은 코끼리도 춤추게 한다’(김재진 지음)는 제목을 비롯해서 ‘Be the Elephant'(Steve Kaplan), 에드 베이커의 코끼리 옮기기’, 헤르만 홀츠의 코끼리를 잡는 계약과 협상’, 기타시로 가쿠타로가 스펜서 존슨의 멘토를 각색한 춤추던 코끼리는 어떻게 되었을까등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도리와 성공비법에 관한 기초 경제 분야 내지는 자기계발서들의 소도구(?)로 코끼리가 사용되었다. 소도구라고 하기에는 몸집이 크니까 촉매제 혹은 도우미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 같다.

 

 

덩치는 크지만 무섭지 않은 인상으로 사람과 친근함으로 상징되는 코끼리. 하다못해 어린이 공원에서 운행되는 코끼리 열차도 떠오르고, 당장 오늘 아침에도 두 살 박이 손녀를 데이케어에 데려다주느라고 스트롤러를 밀고 가는 길에, 우리 아이들에겐 코끼리차로 통하는 꼬마청소차를 만나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지켜보며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지금 여섯 번째 생일을 며칠 앞둔 큰 녀석도 길을 가다가 코끼리차를 발견하면 다가가서 지켜봐야 할 만큼 좋아했었다. 그만큼 코끼리는 사람과 친근한 이미지의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때 고시원에 기거하는 공부벌레 친구들과 어울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에 즐긴 이쑤시개로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기가 있다. 답은 코끼리가 냉장고에 들어갈 때까지 콕콕 찌른다였다. 이른 바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론적인 측면만을 강조하여 치중한 논리의 허구성 즉 실제와 부합하지 않는 이론전개에 대한 빗댐이기도 했다. 일종의 페러독스다. 그런가하면 장님 코끼리 더듬기라는 말로 편협함이나 고정관념에 갇힌 외골수를 비유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비유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실제로 앞에서 말한 대로 코끼리가 우리에게 이름을 차용해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코끼리의 허락 없이 코끼리의 이름을 도용(盜用)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생각일 뿐, 코끼리의 본심은 아니다. 이것이 곧 영장류라고 자칭하는 인간들이 가지는 특권이기도 하다. 어떻튼,

코끼리의 특징은 큰 몸집이다. 큰 몸집은 곧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를 상징하기도 한다. 목표점에 도달하고자 혹은 꿈을 이루고자 할 때 겪어야 할 난관극복이나 문제를 풀어나가는 해결방법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 코식이는 좋아! 누워! 안 돼! 앉아! 아직! ! ! 의 일곱 단어를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트럭소리를 흉내 내는 아프리카 코끼리가 있긴 했지만 사람의 말을 구사하는 코끼리는 코식이가 처음이다. 그 사실이 사육사, 수의사 그리고 외국학자들이 참여한 2년 동안의 연구로 확인됐고, 그 분야의 저명한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연구결과가 발표되면서 정식으로 세계 최초의 말하는 코끼리로 인정받게 되었다. 따라서 코식이는 코끼리의 진화역사에 한 획을 그은 대단한 코끼리가 된 셈이다.

연구진은 코를 입안에 밀어 넣어 입안의 근육들을 조절해서 성도(聲道)를 확장시킨 것으로 사육사와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하여 음성모방을 했을 거라고 말했다. 간단히 말해서 외로움 때문이라는 것이다. 코식이가 아직 거기까지는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쉽게 그랬을 거라는 짐작이 된다. 많고 많은 사람들도 제각각 개성이 다르듯, 코식이 역시 많은 코끼리들 중에서 달리 유난히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닌가 한다.

 

 

올해 스물 두 살, 몸무게 5.5t의 아시아 코끼리인 코식이. 코끼리의 일반적 수명인 60년을 환산하여 사람으로 치면 갓 삼십대에 해당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사육사에게 맡겨졌으니 친구도 가족도 없이 당연히 사육사와 혈연 못지않은 유일한 관계가 형성되었을 것이고, 사육사와의 의사소통을 잘 하고자 노력했을 것이고, 사육사의 일거수일투족에 촛점을 모으며 따라했을 것이다. 그런 코식이를 보면서, 외로움은 동물이든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전기를 일으키고 화학반응을 일으키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과학은 그동안 동물이나 식물도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을 증명해내기도 했다. 동식물들은 꼭 종족보존이나 자기방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외로움 때문에 무리지어 살고, 무리지어 꽃을 피우는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 외로움은 사람만 느끼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 동물이든 식물이든 감각기관이 있는 모든 존재가 느끼는 공통된 감정이다. 그러므로 외로움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과 식물사이, 동물과 동물사이에도 존재할 수 있는 감정이다. 심지어 생명이 없는 물건에 대해서도 그 물건을 아끼는 사람의 감정이 이입(移入)되어 소통하고 관계형성이 가능해진다. 그것이 곧 버리지 못하는 손 때 묻은 물건이다. 하물며 동물이건 식물이건 살아있는 존재사이야 말할 필요가 없다. 단지 소통의 방법이 달라서 불통(不通)일 뿐이다. 식물에겐 식물의 언어가 동물에겐 동물의 언어가 있을지니 숲속에서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을 연구하는 조류학자들로부터 이미 증명된 사실이고, 식물의 사생활을 연구한 식물학자들도 증명한 사실이다.

서로 소통이 되면 좋지만 비록 소통이 되더라도 일치하지 않으면 스파크가 일어나고 그을음이 생기고, 그것이 곧 외로움이다. 인간에게는 사회적 동물로서 느끼는 외로움 외에도 천부적인 외로움, 즉 원초적인 외로움이 있듯이 새에게는 새만의 외로움이, 동물에게는 동물만의 외로움이 있을지도 모른다. 서로 불통이어서 모를 뿐이다. 불통을 해결하려면 서로의 소리를 이해해야 되고, 서로의 소리를 이해하는 길은 결국 인간이 순수자연의 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곧 원시문화(原始文化)의 복원(復原)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일련의 인간성회복 운동이다.

 

 

 

어떻튼, 이번에 코식이가 보내온 메시지는 기존의 비유들과는 다르다. 그동안은 사람들이 코끼리의 의견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이름을 이용한 것이라면 이번엔 코끼리 자신이 직접 자신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것조차도 코식이가 정말 외로워서 말을 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습관적으로 함께 살다보니 닮게 된 것인지는 역시 분명히 밝힐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예에 비추어서 그러리라는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보내온 코식이의 메시지 때문에 나는 코끼리도 외로울 줄 아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 외로움을 사뭇 동조하는 것도 사실이다.

 

춥고 자칫 쓸쓸해지기 쉬운 연말이다. 그래서 진지하게 외로움을 떠올려본다. 빛이 강할수록 그늘이 짙은 법, 다들 행복해 보이는 가운데 외로움은 스며있을 수 있고, 다들 행복하기에 그러지 못한 소수의 사람들이 느끼는 외로움은 더욱 절대적일 수 있다. 어느 구석에선가 있을, 어려움으로 혹은 외로움으로 그늘진 시간을 보내고 있을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러잖아도 추운 겨울이 더욱 혹독하게 느껴질 그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든 위로받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부디 그 외로움에 무너지지 마시라는 말을 하고 싶다. 코식이 처럼 무엇인가 시도해서 외로움을 해소할 수 있길 바란다. 더불어서 춤추는 코끼리도 외롭다는 말을 더한다. 기존의 어느 비유보다도 능동적이고 정확하고 사실적이라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