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절벽위에서 천지개벽을 꿈꾸다 * 권 천 학
-새해 아침에 쓰는 편지
금년 들어 첫 시를 독자들 앞에 차려낸다. 편집자에게 불편을 주어 미안하긴 하지만 이해해 주리라 믿으면서.^*^ ‘부동산 캐나다’에 처음 칼럼을 시작할 때 ‘권천학의 시와 칼럼’이었다. 그러나 하다 보니 컬럼으로만 채워왔다. 편집 할 때 시와 수필을 함께 하기 불편한 점과 분량조절 등의 이유로 들쭉날쭉일 것 같은 생각은 있었지만, 그 외의 특별한 이유 없이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금년부터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시를 선물할 작정이다. 그편이 빡빡한 활자로만 채우기보다는 좀 여유로워 보일 것도 같고, 또 명색이 시인인지라 시를 독자들에게 선물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다. 그동안 보여주신 성원에 더 하여, 시도 독자들의 가슴에 촉촉하게 가 닿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서설 * 권 천 학 서설, 좋은 징조라지요 때마침 새해 첫날, 이곳에도 눈이 펑펑 쏟아집니다 뿌옇게 번지는 허공 마치 그리움으로 가슴이 먹먹하던 지난날들의 어느 한 때 같습니다 만남도 시작도 언제나 순백의 눈송이었지요 저 넓은 세상 속으로 어찌 또 걸어 들어가야 할지 먼지 묻은 옷을 갈아입고 더러워진 손과 발을 씻으며 이름 붙이지 않은 기도를 합니다 또 다시 시작되는 한 해의 첫 기도 뿌리 속 피까지 차게, 뜨거워지는 얼음의 시간을 위하여 아이스 와인 한 잔! 눈 속에서 더 깊이 익는 그 숙성의 시간을 위하여! 오직 흰 빛으로 남을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과 간곡한 시간 염려마저 하얗습니다 허공이 또 얼마나 깊을런지요 먹먹하고 또 먹먹해집니다 그러나 좋습니다 시작은 언제나 먹먹한 설렘이었으니까요
새해의 첫 새벽. 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정좌하여 어둠의 밝음 속에 앉았다. 우주와 대면하고자 마음의 추(錘)를 밑바닥에 내려놓고 심호흡을 한다. 아스라한 절벽 위, 시간의 칼날 위에 선 듯, 싸늘한 섬광이 마음을 긋고 지나간다. 서서히 동이 터 오르며 드디어 아침이 열린다. 새아침이다.
첫 각오, 첫 소망, 첫 다짐, 그리하여 첫 기도······ 첫눈(雪), 첫 사랑, 첫 만남, 첫날밤, 첫 경험, 첫 단추······ 첫 사랑은 첫 슬픔을 가르쳐주며 맴돌다가 사라져버렸다. 첫 입맞춤의 쌉쌀했던 기억은 아직도 달콤 쌉싸롬하다. 첫 만남은 알싸했고, 첫 이별의 아픔은 여전히 아리다. 첫 실수, 첫 도전, 첫 실패, 첫 사랑, 첫 기쁨, 첫 영광, 첫 새벽······. ‘첫’은 절벽이다. 천지개벽이다. 천지개벽이어야 한다.
빅뱅! 그리고 혼돈! 대폭발의 혼돈을 거쳐 온갖 것이 자리를 잡아가고, 아직도 우리가 다 간파할 수 없는 무한한 미지의 세계들은 우주라는 이름으로 펼쳐져 있고, 마치 좀벌레가 한 올 한 올을 파먹어 들어가듯 인간은 과학의 힘으로 미지의 세계가 품고 있는 비밀을 캐내어가고 있다. 그러나 저 무량한 우주의 비밀을, 우주만물의 생성과 존재의 의미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사려(思慮)와 사유(思惟)가 과학보다 더 넓은 영역으로 날개를 펼칠 수 있음을 나는 느낀다. 과학도 결국은 깊은 사고와 염원으로 시작되는 것임을 나는 안다. 작은 목숨 하나에도 우주가 포함하고 있음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우주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 우주적인 질서를 따르고 있음을, 그리하여 존재와 목숨에 대한 경외(敬畏)감과 경건함도 동시에 갖는다.
사유의 시작은 언제나 ‘첫’이라는 절벽에서 시작된다. 딱딱한 각질 속에 들어있는 씨앗의 생명인자가 발아(發芽)하며 밀고 나오는 여린 힘이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혼신의 힘으로 깨트리는 껍질 터지는 소리, 자궁이 찢어지는 아픔을 통과해야만 목숨의 역사가 시작된다. 무거운 흙덩이를 들어 올리고 일어서는 새싹이 천지개벽을 이루어낸다. 민들레 한 포기가 암반 아래에 뿌리를 두고 심층수를 길어 올려 목숨을 가꾸듯, 우리의 의식은 우주에 뿌리를 두고 어둠과 밝음을 두루 섭렵하며 천지만물을 관통하고 있다. 가갸거겨고교······를 처음 배워 알기 시작할 때 비로소 문자(文字)의 세 개로 들어서게 된다. 무지(無知)를 벗어나 머나먼 문명세계로 들어가는 첫 관문에 들어섰으므로 그것은 곧 천지개벽이다. 개안(開眼)이 곧 천지개벽이다. 고여 있으면 썩듯, 움직이지 않으면 죽음이고 변화가 없으면 발전이 없다. 모든 변화는 바로 ‘첫’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첫’ 순간이 바로 칼날이며 절벽이며 천지개벽이다.
빅뱅의 시대, 꼭 우주적인 변화만이 개벽이 아니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살아있음으로 해서 끊임없이 변화해간다. 변화는 발전과 진화를 포함한다. 도전을 감행해야한다. 그 모든 행위가 곧 천지개벽이고, 그렇게 수없이 많은 천지개벽을 한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개미가 언덕을 기어올라 탑을 쌓는 일은 도전이라는 것, 달팽이가 더듬더듬 가는 것 같아도 온전한 목숨을 가지고 우주의 질서를 따라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다못해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조차도 무의미가 아니다. 우리의 삶이 이슥하여지려면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내 속에 숨어있는 있는 나를 깨워야 한다. 도발해야 한다. 오늘 이후의 새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일을 시도하면서 끊임없는 변화를 꾀하여야 한다. 금년에도 작년의 나와 똑같아서는 안 된다. 모두가 우리를 이슥하게 만들어주는 소중한 자산(資産)이 되는 보물단지들이다. 삶이 이슥하여지면 깃드는 무늬도, 그림자도 이슥하여진다. 천지개벽을 도모하는 마음으로 맞이하는 새해. 모든 존재의 변화가 시작되는 ‘첫’의 절벽위에서 다시 시작하는 365마일의 출발이 간곡하고 간절하다. 드넓은 세계 속 으로 가는 첫 날개짓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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