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최악의 운수, 그러므로 살아볼 것이다. 壬辰年!

천마리학 2012. 12. 23. 01:12

 

 

 

 

최악의 운수, 그러므로 살아볼 것이다. 壬辰年!

 

 

양력 연말은 지나 새해가 시작되고, 학교도 겨울방학이 끝나고 개교를 했다. 그러나 아직 겨울의 한 가운데, 봄의 소리는 조금 먼 음력으로는 아직 새해가 아니다. 때맞춰 날아오는 이메일로 재미로 보는 2012년 토정비결이 배달되었다. 해마다 이 때 쯤이면 흔히 있는 일이다. 아무리 과학시대가 되었다 해도 나이 든 어른들은 토정비결에 대한 추억과 흥미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런데 토정비결에 나온 나의 금년 운세가 매우 나빴다. 일년 내내 조심해야할 일 뿐이었다. 이렇게 나쁘게 나온 궤도 있나 할 정도였다.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무엇을 조심해야 할까 하고 주변의 여러 가지 일들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느닷없는 교통사고를 당한다거나, 느닷없는 교통사고처럼 느닷없는 사랑에 빠질 일이 아니고선 특별히 얽혀있는 일이 없다. 그러나 궤가 그렇게 나왔으니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무리 재미로 본 토정비결이라 하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새해 연두부터 무슨 최악의 운수니, 삼재(三災) 등 좋지 않은 이야기 하는지 모르겠다고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초이기 때문에 한다. 나쁜 일이니까 연초부터 자세를 가다듬고, 일 년 내내 행동조심을 하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방기원(防基原)이다. 달리 말하자면 로젠탈효과(Rosenthal effect)를 노리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상대는 나 자신이다. 더불어 타인도 포함한다. 좋지 않음을 공개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함으로써,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나 자신에게 스스로 각인시키고 약속과 다짐을 하며, 완벽한 실천을 위해서, 태만하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미리 말해두는 것이다. 완벽한 성공을 위해서다. 그야 그렇다 치고.

 

솔직히 말하면 이만큼 살았으니 크게 염려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도 살아왔는데 더 이상 나쁠 게 뭐 있겠는가? 온갖 어려운 일을 거쳐 지금에 도착했는데 와 봤자지. 뭐 어려울 게 있겠는가? 비록 어렵다한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쌓여진 내공(內攻)과 이력으로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는 뱃장과 자신감이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 생각해보면 더욱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만큼 살았는데도 아직도 나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만만치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어찌됐던 유쾌하게 웃으며 쉽게 넘어가지지 않는 일이다.

 

 

 

 

 

오래 전의 씁쓸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 일로 인하여 시 <삼재(三災)>도 쓰게 된 일이다. 갓 오십이 될 무렵에 겪은 일이긴 하지만 그 일 이후 지금까지 별로 나쁜 일 없이 그런대로 잘 지내왔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을 때였다. 같이 문단에서 활동하며 모처럼 마음이 통한다 싶은 후배친구를 만났다. 매사 직설적이면서도 약간 퇴폐적인 매력이 있는 친구였다. 비교적 예리한 판단력도 있고, 말귀도 잘 알아듣는 실력을 갖추었으며, 약간 비관론자적인 입장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어 그 친구의 시는 새겨 읽어질 정도의 깊이와 남다른 비애가 묻어있었다. 여기서 퇴폐적인 매력이라 하는 말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일반적인 퇴폐와는 거리가 있는, 일종의 문학적 표현이며, 그래서 매력이라는 말을 뒤따르게 하고, 퇴폐적이라는 비유는 문학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뜻이 잘 통하거나 말귀가 있는 사람들 사이에 사용되는 언어의 하나임을 밝혀둔다. 여하튼 삶의 방법이나 사고의 방식이 남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어 서로 좋아하다보니 마음이 내키면 대전(大田)을 한달음에 달려가기도 하고, 이른 새벽이건 밤중이건 가리지 않고 한달음에 서울로 올라 와 내 집 현관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색깔 없는 문인이 아니라서 우리는 잘 통했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쿵! 하면 짝! 하는 후배였다. 사소한 잡담도 재미있었다. 대담한 것도 직설적인 것도 남다름이었다. 가슴속에 들끓는 보이지 않는 비애를 거침없이 내보이기도 하고 세상을 향한 난도질도 거침없이 했다. 그래서 술이나 담배에 젖어있는 것조차 멋으로 보이고, 충분한 이유가 있어 보이고, 그런 것들이 잘 어울리는 그런 후배였다. 그런데,

사소한 일, 그야말로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사소한 일로 돌아서고 말았다.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그 친구도 그랬을 것 같다. 그냥 돌아선 것이 아니라 엉뚱한 사람과 손을 맞추고 등 뒤에서 총을 쏘았다. 그 총알이 나의 살갗을 뚫었을망정 심장을 뚫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흥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발대발하여 야단을 치거나 총대를 맞받아 대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변에서 더 분개하면서 응징하라고 성화인데도 나는 더욱 조용했다. 그것이 나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끝까지 묵묵부답으로 대응했다. 그것이 겉으론 대범하게 보였을지언정, 실제로 나 자신은 아니었다. 괘씸하고, 실망스럽고, 화가 났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엔 설마 하는 마음과 함께 어느 순간 평소처럼 미안해! 아파서 그랬어! 하며 말문을 열어올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허사였고, 나의 마음속에 서서히 또 하나의 옹이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마음의 문이 서서히 닫히면서 그것이 나의 마지막 악운이길 바랐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고, 지금 나는 낯선 나라에 와서 살고 있다. 그리고 시간은 특별한 일 없이 흘러갔다. 얼마동안은 대전이란 말만 들어도 그 친구가 떠올랐고, 내가 선배노릇을 잘못했구나, 좀 더 따뜻하고 품 넓게 안아줄 걸, 하는 반성도 했었다. 반성도 오직 생각 속에서만 행해졌을 뿐, 세월은 모든 것을 지워나갔다. 이곳에 와서 살면서도 가끔은 그 일이 생각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지워져 갔다. 그러다가 이번에 금년 운세가 좋지 않다는 궤가 나오자마자 대뜸 잊혀져버린 그 일이 다시 생각나는 걸 보니 상처이긴 했던 모양이다.

 

이제 또 다시 맞이하는 정초이다.

좋지 않은 금년 운, 더욱 철저하게 살아볼 작정이다. 어디 한번 살아보자, 얼마나 나쁜가 하는 마음으로.

 

<2012112, 토론토에서><20>

 

'권천학의 수필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애틀통신1-아리도리가 보고 싶다.  (0) 2013.01.28
사과꼭지 하나 따는데 십년  (0) 2012.12.25
실버 쓰나미-죽음이여 경건하라 2  (0) 2012.12.20
비비자!  (0) 2012.12.12
여성의 힘 * 권 천 학  (0) 2012.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