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실버 쓰나미-죽음이여 경건하라 2

천마리학 2012. 12. 20. 07:52

 

 

 

실버 쓰나미 * 권 천 학

-죽음이여 경건하라 2

 

 

또 안락사(安樂死) 문제가 보도되었다. 89세의 데스먼드 왓슨 노인이 기로에 선 주인공이다. 치매를 앓아오던 그가 폐렴으로 20101월 처음 입원했을 때부터 병원과 보호자 사이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때 그냥 죽게 내버려두라.(Let him die.)’는 의사의 말에 충격을 받은 부인 마리아(87)씨는 그냥 죽게 하려면 도대체 병원은 왜 있는 거냐?’고 반문했다. 그 후 3년 째에 접어든 지금, 폐렴은 차도가 있으나 치매가 악화되어 뇌기능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다. 의료진은 연명(延命)치료를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고 가족은 반대다.

흑인인 마리아씨는 10살 때 트리니다드에서 처음 백인인 데스먼드를 만났고, 7년 후 결혼하고, 1963년에 캐나다로 이민해서 5남매를 낳아 함께 길렀다. 두 사람은 독실한 캐톨릭 신자로 자녀들에게 신앙적 본보기가 되도록 노력하며 살아왔다. 7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살아왔으므로 누구보다도 남편의 속마음을 가장 잘 안다. 알기 때문에 현재 의식불명에 빠진 남편과 의료진 사이에서 통역 역할을 하면서 지금도 남편이 자신을 알아본다고 하며 안락사 실시를 거부하고 있다. ‘성모에게 남편을 거둬달라고 기도드린다. 그러나 이 문제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직 하느님만 내릴 수 있는 결정이다고 말하는 마리아씨는 자기가 없는 사이 남편을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남편의 병상 옆에 의자 몇 개를 마지막 방어선으로 늘어놓고 그 위에서 자고 먹으면서 남편을 지키고 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목숨 같은 이 양반 못 보낸다고 하면서 하루에도 수차례 남편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사랑해 여보!’를 속삭인다.

 

 

 

작년 3, 의료진이 의료문제를 처리할 권한이 있는 온타리오 주 정부의 동의수용위원회(Consent and Capacity Board)'에 의뢰한 청문회에서도 마리아씨는 남편에게 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안락사를 허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면서 그의 생명연장을 호소했다. 결국 3년 여 동안 화해불가능인 이 협상으로 병원과 가족들 사이의 대립은 데스먼드 노인이 죽어야만 해결될 수 있는 슬픈 사실이 되었다. 이것은 데스먼드와 마리아 두 사람만의 슬픔이 아니라 노령기에 접어든 사람이나 가족들 모두의 슬픔이기도 하면서 우리 시대가 해결해 나가야할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십여 년 전만 같아도 의사의 시한부 선고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담당 의사로부터 죽음이 임박했다는 말을 들으면 다른 전문의의 의견, 다른 약품, 다른 치료법 등을 찾는 것이 보편화되었고 그로 인하여 의사와 환자사이의 갈등이 빚어지는 일이 허다하다. 이 점에 대하여 토론토대학의 생물윤리학자(bioethicist) 케리 보먼 교수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죽음이 협상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아직도 명쾌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체 법적, 윤리적 불투명성을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문제는 현실적으로 큰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가까이 있으나 죽지는 않은 사람들을 보살피고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데는 그에 상응하는 비용이 든다. 그 엄청난 의료비는 당장 재정적 어려움이 되어 소위 실버 쓰나미가 되고 있다. 의료진의 입장에서 보면 소생가능성이 없는 사람의 목숨을 억지로 연명해나가는 것은 손실이라고 본다. 하지만 가족의 입장에서는 숨이 붙어있는 한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며 매달리게 된다. 어찌 보면 인간이라는 명목 유지를 하는데 드는 비용을 손실이라고 표현하는 것조차 거북하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다. 어느 편도 옳고 그르다는, 혹은 어느 쪽이 더 타당하다는 판정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이다.

 

 

죽음을 앞둔 환자와 가족들의 가치관, 믿음, 희망이 의료진과의 전문적 견해와 상반될 때 생명연장의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의 결정을 누가 할 수 있을까. 정답이 없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골똘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고, 골똘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뚜렷한 방법이 서는 것도 아니다. ‘안락사(安樂死)’라는 말이 대두된 지 오래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헤매고 있으며 정답을 찾기 위해 골똘해질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안락사도 결국 품위를 빙자한 살인행위에 속한다. 자연적으로 숨이 멎는 것이 아니라면, 하늘이 준 수명대로 죽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살릴 수 있음에도 살리지 않거나 자살을 하도록 내버려두거나 자살할 것을 알면서도 막지 않는 것이 죽음을 방조한 죄라면 숨이 멎지 않은 상태에서 호흡기를 제거한다거나 의료행위를 중단하는 것은 살인행위라고 할 수 있다.

 

 

 

왜 죽음조차도 공평하지 않게 주어졌을까? 인간의 운명일까?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도착점이 죽음과 통하는 것도 바로 그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염원 때문일 것이다. ‘태어났음으로 죽음 또한 필연의 운명이라는 불가(佛家)의 화두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여 남과 여로 구별해놓으신 후, 뱀의 유혹에 넘어가 먹지 말라는 사과를 먹고 아담을 유혹했다는 죄로 여성에게 출산의 고통을 준 것이나 모두가 헤어날 수 없는 운명론이 귀착점이다. 태어남도 죽음도 결국 한 선상(線上)에 있는 과정일 뿐이라는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갈등과 성찰을 통한 수양(修養)의 결과이지만, 막상 그 지점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역시 죽음 앞에서는 거부의 몸짓을 먼저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죽음 앞에서는 태어나는 것을 경사(慶事)로 생각하고 죽는 것을 애사(哀事)로 치는 보편적인 사고(思考)도 허무하다.

 

 

생의 마지막 지점인 죽음! 무슨 일이든 품위를 지키고 싶은 것은 당연한 욕구다. 하물며 죽음에 있어서야. 아무리 품위 있게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품위를 잃는 것도 원하지 않지만 비록 품위 없이 살아왔다고 해도 마지막 순간만큼은 품위 있게 죽고 싶은 것도 모두가 원하는 바이다. 그런데 왜 죽음을 한 가지로 하지 않고 이렇게 고통 받는 과정을 만드셨을까? 어쩌면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정상적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장애를 지니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일까? ‘업보(業報)’ 혹은 윤회(輪回)’일까? 쉽게 죽지 못하게 하는 것도 신의 뜻일까? 그렇다면 안락사 시키는 것은 신()의 뜻을 불복하는 저항의 모습이 아닌가. 어쩌면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버티는 것이 신의 권한에 불복하는 것이 아닐까? 품위? 섭리 앞에서 과연 품위가 존재할까? 그야말로 횡설수설, 갈팡질팡, 끊임없이 부질없는 상념으로 시간을 보내게 한다. 그렇다 한들, 어떤 것도 죽음에 대한 정답이 될 수 없으며 명쾌할 수 없다. 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우리 모두의 과제이기 때문에 마음에 획을 긋지 않을 수도 없다. 그리고 죽음은 늘 우리 가까이 있다. 수명이 길어져 조금 멀리 했을 뿐 죽음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았다. 설령 어떤 기준이 되면 의료행위를 중단해야한다는 법령이 나와서 실행된다한들, 과연 그것이 우리의 본심에 접근한 것일까? 아니다. 신의 법이 아닌, 인간의 법을 지킬 뿐이다.

 

남편이 숨을 못 쉴 때는 내가 대신 쉬어 준다고 한 마리아씨의 말이 매운 아지랑이를 피우며 오래 맴돈다. 그 깊은 사랑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기다려줄 수 없는 현실이 얼음송곳에 찔린 것처럼 시리고 아프다.

오래 사는 것이 결국은 쓰나미가 되다니. 오래 살기 위해서 쏟아져 나오는 온갖 정보들을 귀담아 들어가며 장수시대가 열렸다고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회의마저 든다. 그렇게 미지근한 생각밖에는 어찌 해볼 수 없는 상황이지만 경건한 죽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버릴 수 없다. 어떤 것이 과연 경건할까도 모르면서. 참 막막하다. 막막한 존재인 인간으로서 막막한 문제인 죽음이라는 명제 앞에서 부질없이 또 막막하고 참 막막하다.

<20121117>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