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여성의 힘 * 권 천 학

천마리학 2012. 12. 6. 07:37

 

 

 

여성의 힘 * 권 천 학

 

 

 

얼마 전 여성의 날 행사가 있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앗차! 했다. 아직도 여성의 날이 있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내가 얼마나 어둡게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나도 한때는 여성이 차별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아니 인정할 뿐만 아니라 차별받아온 사람 중의 하나로 깊이 동조하며 피해의식으로 매우 불만스러워 했던 시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잊고 살다니. 넌센스!

 

우리나라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고, 무너진 와우 아파트사건도 있었지만 그것을 딛고 날로 고급화되어가던 시절, 아파트살이를 시작했었다. 아파트 살이 몇 년 했을 무렵, 3인 딸을 아침에 학교에 데려다주고 잠시 짬을 내어 근처의 관악산 구비로 아침드라이브를 한 일이 있었다.

그 언덕받이에 잠시 차를 세워놓고 산 아래 옹기종기 이마를 맞대고 있는 남루한 판자촌을 내려다보게 되었는데, 그때 산자락마을의 아침광경을 보고 적이 놀랐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이집 저집 허술한 넝마 같은 이엉아래서 나와 한 곳에 줄을 서는 곳을 보면서 공동화장실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이로 연탄집개에 연탄을 꿰어들고 오가는 개미같은 사람들의 모습도 보았다. 서울에서 아직도 연탄을 쓰나? 저런 곳이 있다니? 놀라웠다. 그러나 놀란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파트 살이를 몇 년 했다고 아직도 공동변소를 사용하는 곳이 있고, 아직도 연탄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외면한 듯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밴댕이 같은 나 자신에 대한 자조섞인 놀람이었다. 이번에 여성의 날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딱 그때의 기분이 들었다. 나 자신이 가소로워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래서 사람은 개구리가 올챙이적 모른다니까. 나만 그런가?

 

변명처럼 이야기 하자면, 여성의 날이 현재까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무심했다는 것을 달리 생각해보면 여성의 지위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여자라고 해서 크게 불편하지 않으니까. 딸이어서 아들에게 치이고, 여자여서 학교공부 못하고··· 하던 것이 일반 상식처럼 되어있던 시대가 나의 어머니시대라면 그 연장선상에서 여전히 가정으로부터 차별받고 사회로부터 차별받고 그리고 남자들로부터 차별받던 것이 바로 나의 시대이다. 그러다가 지금의 후배시대에선 여자라고해서 못할 일 없고, 여자라고 해서 속말로 꿀릴 일 없이 살고 있다. 그게 다 거저 된 것이 아님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1908년 3월 8일, 뉴욕의 의류회사 트라이앵글에서 불이 나서 여성 근로자 14천여 명이 숨졌다. 열악한 근로환경과 과중한 근로시간, 낮은 임금으로 쓰임을 당하던 여성근로자들의 쌓이고 쌓인 응어리가 폭발하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근로시간 단축과 작업환경의 개선, 투표권해사권 등을 내걸고, 여성을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대우와 시민으로서의 대우를 해달라는 요구였다. 그것이 여성의 날의 발화점이었다. 그 날을 기점으로 1910년 독일의 여성 노동운동 지도자 클라라 제트킨에 의해서 여성의 날 이 시작되었지만 사실상 권리박탈, 인격모독, 부당대우 등으로 시달려온 여성의 피나는 역사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였다.

유럽의 산업혁명과 시민혁명 등을 거치면서 공장에서 일할 사람들이 필요해졌고, 세계경제가 자본주의 체제로 급속하게 바뀌면서 대량의 노동력은 필수, 여성도 나서야 했다. 아니 가사노동에만 전념하던 여성들을 불러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남성과 다른 차별을 받아왔고, 참정권도 없던 시대를 거치면서 여성들의 응어리는 굳어져 온 것이고 그것이 결국은 뉴욕광장의 불길로 이어진 셈이다. 여성은 단지 노동력일 뿐이었고, 부속품이었을 뿐이다. 남녀관계의 아이러니이다.

 

우리나라에도 1980년대 중반에 여권운동이 활발해졌었다.  

내가 운전을 시작한 80년대 초였는데 그때 만해도 한국엔 여자운전자가 보기 드물었다. 어쩌다가 차를 몰고 시골에 가면 동네아이들이 모여들어서 신기한 구경이라도 하는 쳐다봤고, 길거리에서 남자운전자들의 방해도 많았다. 순전이 횡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차 여성운전자들이 늘어나자 차가 막히는 것도 여성운전자들 때문이라고 우기기도 했다. 여성운전자들을 비하하는 말을 날리며 진로방해를 하는 일도 허다했다. 어쩌다 여성운전자가 추월이라도 하면 기어코 앞지르는 남성운전자도 흔했다. 그러자니 자연 난폭운전이 될 수밖에. 오죽했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잘 달리고 있는 여성운전자에게 지나가던 남성운전자가 차창으로 목을 빼고 , 집에 가서 밥이나 해! 하고 야유하면, 여성운전자가 그래 지금 밥하러 간다!’하고 응수했을까. 외통골목에 들어서서 3분의 2나 지나갔는데도 맞은편에서 뻔히 보면서 우기고 들어온 남성운전자가 앞을 가로막고 비켜주지 않아서 버티다가 끝내 뒤로 물러서주지 않아서 아무 말 없이 시동을 끄고 내려서 골목을 걸어서 되돌아 나와 버린 일도 있었다.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많다. 이유는 단지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피나는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음을, 오늘의 여성들이 누리는 안락함이 그냥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달콤한 열매를 생각 없이 즐기기만 하는 지금 세대의 젊은 여성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원스 어폰 어 타임, 옛날옛적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 정도로 치부할 것이다.

그런 시대를 관통하며 겪어 온 나 자신도 어느 새 편안한 생활에 다 잊고 여성의 날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다니, 참으로 간사한 게 사람의 마음이다. 하여튼,

 

 

지금은 오히려 가정에서 여성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고 이에 불만 품거나 반기를 들면 언제 내쳐질지 모르는 간 큰 남자가 되기 딱 십상인 시대다. 농담이라곤 하지만 순전히 농담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특히 당사자인 남자들 중에도 그런 사람은 모른긴 하지만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 때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다. 여자는 아예 사람이 아닌 암탉에 비유될 지경이었다. 그에 항거하여 생긴 것이 암탉이 울어야 달걀을 낳는다로 바뀌었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고 했던 것이 여자가 셋이 모이면 집 한 채가 생긴다로 바뀌었다. 부동산 투기가 됐건 땅 투기가 됐건 간에 집안 살림 늘이는 수완이 남자들보다 낫기 때문에 집안 살림살이 형편이 좋아진다는 의미다. 그만큼 여자들이 가정경제를 일으켜 세우는 주역으로 자리바꿈을 한 것이다. 물론 남자와 여자의 협력 하에서 이뤄지는 것이긴 하지만 만약 여자에게 맡겼다가 실패확률이 높았다면 여자들에게 계속 맡겼을까?

여자 말을 들어야 가정의 평화가 오고 인생이 편해진다고들 하는 것 자체가 다 손익계산서의 결산 결과 흑자였기 때문이지 남자들이 너그러워서일까? 말하자면 백짓장도 맞들거나 아니면 튼실하고 능력 좋은 일꾼하나를 얻은 셈 치면서 속으로 으흐흐 웃으며 뒷전으로 은근슬쩍 물러나 앉은 남자들. ‘여성의 직감은 남성의 교만한 지적 자부심을 타고 넘는다고 한 마하트마 간디의 말을 실감하고 인정한 남자들의 속셈. 여자의 눈엔 다 보인다^*^. 남자들의 속마음을 여자들이 모를 줄 알고?

 

얼마 전,

이제는 여성회원들이 나설 때라고 촉구하면서 여성회원들이 나서서 엉크러진 온주 실협을 바로잡아 줄 것을 적극 권장하는 김치맨님의 글을 읽었다. 실협 사태야 전혀 모르는 입장이지만 그동안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어수선한 기사들로 하여 대충 짐작하고 있는 터였고, 오죽하면 그럴까 이해도 갔다. 이제는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지금은 새로운 회장도 뽑히고 해서 정리의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 모양새가 보여 다소 안도하는 상태이고, 여성회원들이 나서달라는 김치맨의 글을 읽으면서 여성의 힘이 과연 무엇일까?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였다.

 

여성의 힘,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여성성(女性性)일 것이다. 여성성 속에는 모성(母性)도 들어있다. 여성성의 총칭이 곧 모성이기도 하다.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약승강(弱勝强), 유승강(柔勝剛)’이 아니겠는가. ‘여성은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고 설파한 빅토르 위고도 있다. 누구나 다 다급하거나 위급할 때, 죽을 때가 되면 어머니를 찾는다. 먼 태평양을 돌고 돌아 북태평양의 베링해까지 거친 물살을 헤치고 갔던 연어가 파도를 거슬러 다시 모천(母川)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그 모성을 품은 여성성이야말로 부드러우나 강한 힘이다.

굳이 여권을 부르짖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살면서 사소하게는 개인이나 가정 그리고 나아가서 사회적으로 혹은 세계적으로 빛나는 여성성이 알게 모르게 스며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론 아직도 끊이지 않는 전쟁과 사사로운 다툼, 가난, 거친 사회의 거친 호흡들, 아픈 사람들, 어두운 사람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추운사람들··· 여전히 어머니, 즉 여성성의 위력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 세계적인 현실임을 묵과할 수 없는 실정이다. 하여, 새삼스럽지만 여성의 여성성을 보배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20125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