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인민재판과 무엇이 다르랴

천마리학 2012. 11. 29. 01:40

 

 

 

 

인민재판과 무엇이 다르랴 * 權 千 鶴

 

 

대선을 앞둔 선거전이 들끓고 있는 중에 불편한 현장을 목격할 수밖에 없는 나라의 국민이라는 것이 참 속 상하다. 과거사에 대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사과 때문이다. 솔직히 연좌제와 인민재판이 연상되었다. 과연 온당한 요구이며 온당한 절차인가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국민이니까. 건강한 의식을 가진 국민이고 싶으니까. 떠나와 있으면서 왜 고국정치얘기냐 할지 모르지만 떠나와 있어도 국민은 국민이고 이제 해외국민 투표권까지도 주어진 마당이니 지적할 것을 지적하는 것이 도리라는 생각에서다.

그동안 역사관을 밝히라는 강요와 함께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종용받아오던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드디어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말로 기자회견을 마쳤다. 이 말이 과연 사과라고 할 수 있을지는 받아들이기 나름이지만, 그 말이 곧 박근혜의 역사관까지 포함되었다는 생각이다. 지지율이라는 미끼에 걸려 어쩔 수 없이 그런 과정을 치러 내야하는 심경이 어떨까. 힘들었을 것이지만 지금 박근혜의 심경 따위를 논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려면 박근혜의 심경을 묻기 이전에 강요한 사람들의 심경부터 이야기해야 할 테니까. 단지 내 생각, 그런 장()까지 가야하는 정치현실이 속상해서 연 말문이다.

 

 

이탈리아의 독재자였던 베니토 무쏘리니 총독. 그의 딸이라는 이유로 평생을 숨어살며 고통스럽게 일생을 마감한 무쏘리니의 딸이 떠올랐다.

남침 후 사흘 천하였던 인민공화국 시절, 포섭된 한 사람을 방안에 앉혀놓고 총칼의 힘으로 마당에 모이게 한 마을사람들을 문구멍으로 내다보고 누가 좌익인지 우익인지 지적하게 했다. 강요에 못 이겨 마을사람을 지적해야하는 그 사람. 손가락이 달린 것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연좌제에 묶여 젊은 시절을 힘겹게 보낸 선배시인이 있다. 한국전쟁 시절에 사라진 아버지가 월북했다는 이유였다. 매일 출근하는 교무실에, 출퇴근하는 교문근처에, 모임자리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요원이 저승사자 같았다고 했다.

지금은 이탈리아의 독재도, 인민재판도, 연좌제도, 다 흘러가버린 역사속의 흔적들이다. 홀로코스트와도 다르다. 그런데 지금 와서 딸에게 과거 아버지의 잘못을 사과하라고?

좋다. 쿠테타나 유신이 방법론으로 말하자면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박근혜의 말처럼 헌법의 가치가 훼손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는 총체적으로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을 이루기 위해서 저질러진 과() (). 공을 논하려면 과도 논해야한다. 공은 입 다물고 과에 대해서만 추궁을 하는 것은 토론이나 담론의 방식에서부터 잘못되었다. 그런데도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공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가끔 요즘 젊은 층에서 박정희의 공을 들추는 세대를 향해서 박정희 시대의 향수를 가진 사람들로 지칭하며 시대의식이 뒤떨어진 기성세대취급을 하기도 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몰라서가아니라 알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지금의 현실정치가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과거의 독재형태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젊은 사람들이 오히려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실제로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박대통령의 잘 한 것만이 아니라 잘못한 것도 다 알고 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까지도 헤아리고 있다. 헤아리기 때문에 잘못한 것을 덮어나가는 것이다. 잘못된 절차와 방법이긴 했지만 그렇게 했기 때문에 우리가 어둠의 터널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인정한다. 일종의 당위성이라면 당위성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추인(追認)받은 것이나 같다. 그런데 지금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정작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세대들이다. 오히려 연좌제의 고통을 겪어 그 억울함을 아는 세대가 연좌제를 실시하는 형국이다. 아이러니다.

 

어찌됐건 아버지의 무덤에 침을 뱉으라고 요구하는 꼴이 되었다. 과연 온당할까? 박대통령의 딸이었기 때문에 오늘의 대통령 후보까지 된 데 영향을 미쳤을 수는 있다. 대통령의 가족으로서의 생활을 경험했으므로 국가나 정치에 대한 남다른 안목도 생겼을 것이고 의식도 만들어질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어렸던 딸에게 아버지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 그것도 분명 공이 많은 아버지에 대해서 침을 뱉으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인간적인 처사다. 정쟁(政爭)으로 삼은 것 자체도 유감스럽다. 결국 지지율이라는 쇠고랑에 묶여 사과 아닌 사과를 했다. 그런데 그 사과에 대해서조차 미흡하느니 애둘렀느니 완곡한 표현이니말들이 많다. 그 논조들을 보면서 한심함을 금할 수가 없다. 그 논자(論者)에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되묻고 싶다. 노무현대통령이 처가(妻家)의 이적(利敵)행적으로 논란이 되었을 때 그럼 나더러 이혼하란 말이냐고 했던 일이 되살아난다.

한 신문의 논설에서는 박근혜의 사과내용에 대해서 첫째 둘째 따져가며 핵심을 빼먹었다느니 완곡한 표현이라느니 섣부른 문장론까지 섞어가며 미흡함을 지적하고 있었다. 사과행위 자체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사과해야함을 전제로 한 그 자체부터 마땅찮다. 또 다른 신문사설은 박근혜의 사과에 공감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41.6%'공감 한다', 40.9%'공감하지 않는다'고 엇비슷하게 답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기사에서 질문내용이 사과요구 행위에 대한 것인지 사과내용에 대한 것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매정한 세상인심에 비추어보면 사과내용에 관한 것일 확률이 높지만, 어느 것이든 간에 행간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설령 사과의 내용이 양에 안찬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해도, 정치적 소득을 노려 강력하게 요구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거의 비슷한 비율이라는 것. 말하자면 마치 국민 모두가 요구를 원하는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세상은 그들만의 세상이 아니라는 것.

 

 

한 마디 더 하자면 그만하면 됐다고 한다는 안철수 문재인도 떫다. 그들이 그 시대를 산 사람들도 아니고 희생당한 사람도 아니라는 점에서다.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 25년이 지난 2004년 당 대표가 된 박근혜가 DJ(전 김대중대통령)를 찾아가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 피해를 보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드립니다했을 때 참 고마웠다고 하면서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박정희가 환생해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 그래서 박근혜에게 동서화합을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내가 못한 일을 하라 해서 미안하지만 박 대표가 제일 적임자.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고 했다고 DJ는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정치 고수(高手)인 그도 그렇게 말했는데, 하물며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정치판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딸에게 아버지의 과거행적을 걸어 목을 조이는 것은 비인간적인 처사다. 삼강오륜이 부끄럽다. 딸에게 사과를 요구할게 아니라 정치를 맡겨서 나라를 더 잘되게 이끌도록 하면 우리는 다 얻는 것이 아닐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교과서에나 갇혀 있음직한 역사가 정치의 장으로 끌려나오고, 홀로코스트 재판처럼 언론의 화제를 모으며 재판정에 서게 되는 것이 역사학의 정치성이라면서 그래서 역사학은 핵물리학만큼 위험하다고 했다. 그리고 역사는 심판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진리는 심판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과 같다고 했다. 아니라는 의미다. '적대적 공범자들'의 저자 임지현 교수 역시 역사는 기억함으로써 극복 한다고 했다. 적극동감이다. 역사를 기억속에서 끌어내어 펼쳐보며 참고하는 것이지 지나간 잘못을 지금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잘못되었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반복되는 인간의 망각증 혹은 순간의 유익(有益)을 위해서 반복하는 이기심을 탓할 수밖에 없다. 무참한 일을 저지르며 미숙한 속을 드러내는 오늘의 정치현실이 더 이상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2012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