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사과꼭지 하나 따는데 십년

천마리학 2012. 12. 25. 11:44

 

 

 

사과꼭지 하나 따는데 십년 * 權 千 鶴

 

 

 

 

 

이번 추석에 꼭지 사과 기획세트가 한국의 대형마트에 출하되어 꼭지 없는 일반사과보다 10% 싼 가격으로 팔렸다는 기사를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간단한 제도하나를 바꾸는데도 거북이걸음보다 더 느린 관행과 물건 값이 산수(算數)의 기본이 적용되지 않던 이상한 시장논리를 이해할 수 없었던 때가 떠올라서였다. 한편으론 사회가 눈곱만큼 정직해졌구나 하는 생각과 내가 한국을 떠나 온 이후에 소비자가 조금 더 대접받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과 꼭지 하나 따는데 십년 세월이 걸렸다. 그리고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값을 올렸을 수 있는데 조금 비싸게 팔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고 조금 싼 값으로 팔았다. 그 두 가지가 이야기의 핵심이다.

 

꼭지 따는 일의 수고가 덜어졌으니 당연히 값이 싸져야 맞다. 당연히 맞는 그 일에 대해서 사회가 눈곱만큼 정직해졌다는 생각을 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부터 말하자면 바로 현미(玄米) 이야기다.

모두 하얀 쌀만 먹던 시절, 현미가 등장했다. 쌀에서 가장 영양가가 높은 껍질부분과 쌀눈이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벼의 겉껍질인 왕겨부분만 벗겨낸 상태가 현미다. 그러나 백미에 익숙하다보니 소화에 문제가 되는 사람도 있고 조리과정도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80분도니 70분도니 하는 도정의 정도가 분류되었고 현미밥솥 즉 압력솥이 나왔다. 말하자면 속껍질을 어느 정도 벗겨내느냐 하는 정도에 따라 나뉘는 것으로 70%만 벗겨낸 것이 70분도, 80%를 벗겨낸 것이 80분도였다. 100%벗겨낸 것이 백미이니 짐작해보면 알 일이다. 현미가 백미보다 공정이 덜 든다. 당연히 값이 그만큼 낮아져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미 가격이 비싸서 현미가 처음 나왔을 땐 부자들만 먹었다. 그것이 이상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치의 기본을 정하는 다른 셈본방식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값이 왜 비싸냐고 투덜대었지만 소리 없는 아우성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몇 십 년이 지난 지금에야 현미가격이 백미가격과 같아졌다. 만족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라도 되었으니… 만족할 수 없는 이유는 더 낮아져야한다고 생각하지만 보관이나 유통 상 특별한 주의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들어 접어 생각해준다. 꼭지사과가 가격에 현미식의 공식이 적용되지 않은 것만으로 사회가 조금 정직해진 것 같고, 소비자에 대한 대접이 좀 나아졌다고 근근이 끌어다 붙여 해석해 보는 것이다.

 

이번엔 꼭지 따기에 대한 이야기다.

 

 

 

 

 

 

5년 전 캐나다에 처음 왔을 때 과일가게에서 꼭지가 달린 사과들을 발견하고 마치 과수원에라도 온 듯 신기하게 느껴졌다. 불현 듯 타임머신을 타고 꼭지사과가 흔했던 60년대로 돌아가게 했다. 그때쯤엔 나도 젊어 싱싱하던 시절이었던 것처럼 꼭지를 달고 있는 사과들도 싱싱했었다. 벌레 먹은 사과나 병든 사과 혹은 폭풍우에 억지로 떨어진 낙과(落果)의 경우가 꼭지가 없거나 혹은 있어도 싼 값에 팔렸다. 사과상자도 얇은 나무 궤짝이고 컸다. 푸짐했다. 사과상자를 열면 세 층으로 쌓여있는 사과사이에 종이가 깔려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과상자가 변하기 시작했다. 종이상자가 나왔고 층 사이에 깔았던 종이가 골판지로 바뀌었다. 골판지가 나온 것이 70년 대 쯤이다. 그러는 사이 언제인지 모르게 꼭지가 사라졌다. 꼭지가 종이나 골판지를 뚫고 나와 다른 사과에 흠집을 낸다는 이유에서다.

 

오이나 수박을 살 때 꼭지부터 살핀다. 다른 과일이나 채소들도 마찬가지다. 꼭지가 바로 신선도를 말해주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장사꾼들은 꼭지가 마르지 않도록 은박지로 감싸기도 하고 그도 안 되면 마지막 방법으로 오래 된 것을 감추기 위해서 꼭지를 따내버린다. 사과의 꼭지가 사라진 것은 신선도를 구별할 소비자들의 권리를 박탈해버린 것과 같다. 그런 사실이 묵과된 체 시간은 말없이 흘러갔다. 소비자는 왕이 아니니까.

80년대로 들어서면서 선물상자들이 작아졌다. 소량의 포장 혹은 일인용 포장이 유행했다. 소위 핵가족시대가 되면서 가족단위가 작아졌고, 만혼(晩婚)이 유행되면서 일인가족도 적잖기 때문이다. 각종 선물상자들이 작아지는 대신 세련되고 화려해졌다. 더불어 사과상자도 작아졌으나 여전히 꼭지가 없는 체로다. 과대포장, 혹은 허위포장이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여전히 사과꼭지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고 여전히 소비자는 왕이 아니었다.

2천 년대에 들어서면서 꼭지 없는 사과에 대해서 논의가 시작되었다. 한국의 사과에만 꼭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행되지 않은 채 꾸물대다가 드디어 금년 추석에 꼭지사과가 나왔다. 사과 꼭지 하나 따는데 10년 세월이 걸린 것이다. 더 정확히 소비자들이 불편했을 때부터 치자면 30년이 걸린 셈이다.

우리나라 전국의 사과과수원에서 꼭지를 제거하는 작업에 들어가는 비용이 총 190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190억 원의 경비를 줄이는 방법도 되는데 왜 사과꼭지 따는 일이 그렇게 늦어졌을까?

 

80년대, 저축추진위원회의 일을 하면서 열심히 저축하자고, 근검절약하자고 교육과 계몽에 앞장섰다. 쌍룡건설이니 현대건설이니 미륭건설이니 하는 굵직굵직한 건축회사들이 앞 다퉈 아파트들을 지어대던 때이다. 자개농이 유행하고 허영과 사치 풍조가 만연해서 망국병이라고들 했다. 한편에선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치는데 부자들은 비싼 자개가 박힌 장롱들을 부(富)의 척도로 삼으며 허영을 부추겼고, 많은 여성들,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가는 주부들의 속을 긁었다. 동교동 어디어디, 혹은 이태원 어디어디, 고급 장롱가게들이 명성을 떨쳤다. ‘장인(匠人)가구’니 ‘왕실가구’니 ‘명품가구’니 하면서 사치와 허영심에 불을 질러댔다.

 

 

근본적인 대책을 궁리한 끝에 장롱 없애기 운동을 벌였다. 대안(對案)으로 당시 줄줄이 들어서는 아파트의 설계에 붙박이장을 넣도록 하자고 당국에 건의했다. 전통적으로 있던 벽장을 좀 더 업그레이드 하자는 것이 나의 취지였다. 아파트에 아예 붙박이장이 있으면 이삿짐도 줄어들고 호화장롱으로 번지는 사치도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트렁크만 들고 이사할 수 있는 시대를 열자고 강조했다. 정부의 주무부서에서도 동의했다. 그러나 실행은 감감무소식. 헛김나게 열을 올리던 그 무렵, ‘보르네오’라는 중저가 가구체인점이 들어왔다. 그래도 붙박이장을 만드는 일은 여전히 꿩 먹은 소식. 알고 보니 기업과 정치의 연계 때문이었다. 경영학을 공부하면서 배운 산학(産學) 즉 산업과 연구기관인 대학의 연계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산정(産政)의 현장을 목격한 셈이다. ‘로비’라는 떳떳하지 못한 명목으로 자행되고 있는 오늘날 정치와 기업의 결탁을 비추어보면 충분히 짐작 될 것이다.

 

한 가정에서도 굳어진 관습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은데 하물며 나라 살림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리라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나라살림이기 때문에 더욱 과감히 추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번의 사과 꼭지 문제에 있어서도 장롱문제처럼 기업 혹은 힘 있는 생산자들의 로비나 풀기 어려운 역학관계가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안(事案)으로 봐서 그럴 성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간단히 말해서 나태와 안일 때문이다. 사과농장 주인은 안일했고, 담당공무원은 나태했다. 결국은 소비자들만 손해를 보아온 셈이다. 이제라도 바뀌었으니 다행이라고 하겠지만 박수까지 치며 칭찬할 수는 없다. 진즉 고쳤더라면 사과는 더 오래 신선할 수 있었고, 농가는 일손과 경비를 덜었을 것이고, 소비자들의 입은 즐거웠을 터인데… 이를 두고 유식한 척 하자면 흔한 만시지탄(晩時之歎) 보다는 亡牛補牢(망우보뢰)가 더 타당할 듯 하다.

<2012년 10월 31일> <20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