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시애틀통신1-아리도리가 보고 싶다.

천마리학 2013. 1. 28. 03:16

 

 

 

아리 도리가 보고싶다 * 할머니

시애틀 통신 1

 

 

 

 

 

 

 

 

 

 

시애틀에 온지 벌써 4일째, 아리와 도리가 보고 싶다.

이번 시애틀 여행은 ‘엄마(딸)’가 토론토대학 대표로 ARL LCDP 심포지엄에 참석하는 출장에 동행하는 것으로, 근래, 할머니가 매우 지쳐하는 것을 눈치 챈 ‘아빠(사위)’의 배려로 이루어진 보너스 여행이다.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아리 도리를 돌보는 일과 집안일에서 손을 떼고 홀가분하게 보내고 원기를 회복하라는 배려였다.

말이 쉽지 출근하는 사람이 아침마다 아리 도리 두 녀석을 학교와 데이케어에 데려다주고, 오후면 데려와야 하니 아침 7시경이면 집을 나서는 출근시간이 더욱 바쁠 것이고 퇴근 시간도 앞당겨 조정해야 한다. 며칠 안 되는 날짜이긴 하지만 출근하는 사람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라서 사양했으나 막무가내였다. 작년에 할머니 혼자서 수고가 많았으니 이번엔 자기가 수고를 하겠다는 것.

작년엔 할머니 혼자 아리 도리를 돌봐야하는 일이 많았었다. ‘엄마’의 국제행사 때문에 한국에도 한 번 다녀왔고, 택사스와 다녀왔고, 뉴욕과 시카고의 학회 때도 다녀왔다. 또 ‘아빠’의 멕시코여행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엄마’와 ‘아빠’의 강력한 권유를 못이기는 척 받아들인 터다. 마침 두어 달 전부터 이상하게도 지쳐있기도 했었다.

 

떠나는 순간부터 눈에 밟히는 게 아리와 도리였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아리 도리 생각에 발걸음이 허방을 딛는다. 팀 호튼스 앞을 지나면 팀 호튼스의 레귤러 샌드위치를 좋아하는 아리가 생각나고, 울긋불긋 장난감 앞을 지나가도, 꼬마들을 봐도 아리 도리가 생각나고 우산가게 앞을 지나가면 매일아침 데이케어에 가면서 멀쩡한 날에도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서는 스타일리스트 도리가 생각나고...... 호텔방에 들어서자마자 노트북을 꺼내어 떠나올 때 현관 앞에서 찍은 사진을 올려놓고 보고 또 본다.

아리 도리가 태어난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이렇게 떼어 놓아 본 일이 없다. ‘엄마’는 할머니 믿고 학회며 심포지엄이며 각종 국제회의에 참석해왔지만 그때마다 할머니는 아리 도리를 돌봐야 했다.

 

할머니는 이곳에 도착해서도 바쁘긴 매한가지다. 다만 아리 도리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육체적 노동이 없는 것뿐이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니 식사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고 종류도 다양하게 골라 먹을 수 있다.

‘엄마’가 온종일 ARL LCDP 심포지엄에 참석하는 동안 할머니는 혼자 시간을 보내지만 여전히 일분도 빈틈없이 보내고 있다. 칼럼원고를 써 보내고, 시내 관광도 하면서 바쁘게 보내고 있다.

도착하자마자 아리 도리에게 보여주라고 ‘아빠’에게 사진 몇 장을 메일로 보냈다. 피얼스넌 공항에서 아리가 특히 좋아하는 팀 호튼스에서 레귤러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찍은 사진과 이곳 시애틀에 있는 ‘호텔 1000’의 숙소에 들어서는 순간 대형 TV 화면에 ‘Welcome Hana Kim' 이라고 쓰여 있는 화면사진, 등 ’엄마‘와 할머니 모습도 담아서 찍은 사진을 보냈다. 아리 도리에게 엄마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란다 하고 알려주려는 의도였다. 첫메일에 이어서 매일 아리와 도리 그리고 ’아빠‘의 안위를 묻는 메일을 띄웠다.

 

오늘도 한국일보에 났다는 나의 시 <폭설설법>을 보고 몇 명의 독자들이 메일을 보내왔다. 떠나면서 급히 보낸 것이지만 나는 이곳에 있으니 아직 보지 못했다. 그 중에 문학카페에도 올려달라는 요청도 있는데 그럴 여유는 없고, 아리 도리 생각만 간절하여서 또 다시 사진을 들춰보면서, 안면암 식구들에게 안부 겸하여 안면암 사이트에 올리려고 이 글을 쓴다.

 

그래도 그 동안 매일 한 꼭지씩 에세이를 쓰고, 우리의 재래시장과 부산의 자갈치를 합한 것과 같은 분위기의 시애틀 Public Market과 그 지역에 있는 ‘스타벅스 커피 1호점’에도 들려 커피도 마셨다. ‘스타벅스 커피 1호점’은 1912년, 시작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좁은 공간에 의자도 없이 서서 마시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런데도 구경 온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어제밤 Public Market에 과일을 사러 두 번 째 갔을 때 특별한 경험을 했다. 시장 입구에서 세 번 째 과일가게였다. 블루베리와 딸기를 고르고 있는 나를 보고 안에서 달려 나온 젊은 점원이 처음엔 영어로 묻기에 나도 영어로 대답을 했다. 그렇게 몇 마디 주고받았는데, 내 발음이 이상했는지 아니면 외모로 짐작했는지 갑자기 ‘한국사람이세요?’ 하고 어색하게 말했다. 2003년에 의정부에서 군복무를 했는데 지금은 한국말을 거의 다 잊어버렸다고 했다. 내가 영어가 서툰 것이나 피장파장 아니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하면서 잠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카드를 내밀어 값을 지불하는데 2불을 깎아서 계산해주는 것이었다. 오, 땡큐! 돈 2불이 커서가 아니라 정찰제로 되어있는 북미에서 값을 깎아주는 일은 처음이다. 캐나다에 살기 시작한 초기에는 한국에서처럼 깎고 싶기도 했고, 깎으려고 하다가 ‘엄마’에게 지청구도 받았었다.

차이나 타운도 둘러보았다. 코리아 타운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 아쉬웠던 마음을, 공항에서 다운타운으로 들어오는 길목의 부두에 ‘HAN JIN'이라고 쓰인 컨테이너가 90%이상 쌓여있는 것을 보고 뿌듯했던 마음으로 대신한다. 그 외에도 지진방어의 특별 설계로 유명한 시립도서관을 둘러보고 아트박물관, 구 도시의 유적지인 파이오니어 광장(Pioneer Square)도 둘러보고, 시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The Seattle Great Wheel 도 탔다.

또 한 가지 특별한 쇼핑도 했다. 워터 프론트 근처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가로 세로 각각 30cm정도의 목각 부처님 상을 샀다. 보리수를 상징하는 나무와 부처님의 얼굴이 편안하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가득 차게 깎아 만든 것이다. 자연스런 나무의 색도 좋고 부드럽고 편안한 부처님의 표정도 마음에 든다. 그러잖아도 두어 달 전부터 한국집에서 염주를 챙겨 보내달라고 동생에게 부탁했지만 찾을 수가 없다고 해서 포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내가 무슨 신심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근래 들어 그동안 냉담으로 보냈던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상기하면서 불경도 읽고 싶고 또 잠깐씩 명상을 할 때 염주를 손에 쥐고 싶어서였다.

어떻튼 내가 다시 불교에 마음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안면암 식구들 덕택이다. 양자언니의 권유로 시작한 후 설봉스님을 비롯하여 여러 보살님들의 댓글을 읽으면서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어 매우 기쁘다.

 

어제 ‘아빠’의 메일이 왔는데, 할머니가 첫날 보낸 사진을 아직 아리 도리에게 보여주지 않고 있으며 할머니가 아리에게 낸 숙제만 전했다고 했다. 얼핏 바빠서 그랬나 하고 생각했는데 이유는 다른 것에 있었다. 그러잖아도 아리 도리가 수시로 엄마와 할머니를 찾으며 그리워하는데 그 사진을 보여주면 더욱 슬퍼할 것 같아서라고 한다. ‘아빠’도 출근하면서 아침에 데이케어와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후에 데려오고…… 또 일찍 퇴근해서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혼자 두 녀석을 감당하기도 어려울 텐데, 엄마와 할머니를 찾으며 보채면 더욱 힘이 들겠구나 공감이 되었다.

할머니도 시시때때로 아리 도리가 보고 싶은데 아리 도리라고 왜 안 그럴까. 내가 보고 싶은만큼 저희들도 내가 보고 싶은 모양이다 생각하니 또 다시 뭉클, 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또 다시 떠나올 때 찍은 이 사진을 들여다본다.

 

호텔로 돌아와 한국뉴스를 보니 한국이 혹한이 덮치고 있다니 안면암 식구들 모두 건강 조심하시기 바라면서, 잠시 짬을 내어 이 글을 올린다.

안면암 식구들 모두모두 안녕히!

 

<2013년 1월 26일,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