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메일과 손편지 * 권 천 학
연방우편공사(Canada Post)가 16년 만에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연금운용부담 증가 등의 원인으로 지적되긴 하지만, 말할 것도 없이 우편물량의 감소 역시 주원인이다. 매년 줄어드는 영업이익, 급기야 적자를 기록하는 현실에선 영업방침을 전면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어 우체통을 걷어들이겠다는 것, 쉽게 예상된 수순이다. 인터넷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당연히 그러리라고 이미 예상됐던 일, 오히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의 변화속도에서 그동안 잘 버텨왔다는 생각도 든다.
‘기다림도 오래되면 빨갛게 열꽃이 된다 겉껍질은 모두 벗겨지고 핏물 밴 속생각 번져 새겨진 그리움으로 온몸에 돋아나는 알파벳 문신 이제는 부끄러움도 없이 보고 싶다는 속말을 펼쳐 보이며 황량한 도시의 골목 어귀 당신의 추억을 밟고 쓸쓸히, 미친 듯 서서 해넘이를 보고 있다···’
오도카니 기다리고 서 있는 빨간 우체통을 보며 시를 쓰기도 했는데··· 머지않아 그 마저도 역사 속으로 스며들고 말게 되었다. 아쉽다.
이미 생활이 일부가 되어버린 전자메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용하고, 그 편리함을 누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손편지를 기대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전자메일이 편리한 문명의 이기(利器)라면, 손편지는 마음 한 조각을 봉투 속에 넣어 보내거나 묻어두고 언젠가 싹트기를 기대하며 간직하는 마음의 씨앗 그릇이다. 그 속에서 추억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손때 묻은 문갑처럼, 혹은 오래 간직하고 싶은 나전칠기 함(函)처럼.
비록 연방우편공사야 손익계산의 결과에 따르는 자본주의적 발상에 철저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빠름과 간편함만 쫒다가 오래된 고향집 우물처럼, 우물가에 서있는 한 그루 향나무까지 담겨있는 가슴 한쪽을 잃어버리게 된다. 아무리 속도와 편리함을 추구하며 살아도 속도 속에는 느림의 속도, 편리함 속에는 불편함의 미덕이 스며있다. 고로 느림도 속도이며 불편함도 편리이다. 그것마저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잃어도 크게 잃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아무 생각 없이 마음 놓고 사용하다보면 결국에는 심장 한 귀퉁이마저 건조주의보가 내리게 될 것이다. 건조주의보는 금방 전신으로 퍼져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버튼조작과 명령어로만 움직이는 로봇과 다를 바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번 쯤 짚어보는 것이 어떨까.
일단 빠르다. 매우 빠르다. 두말 할 것 없다. 편지만이 아니라 초대장이며 청구서며 공공 안내문까지 모두 이메일이 실어 나르게 되면서 즉답을 듣고 즉결처리 할 수 있다. 손가락 끝에서 톡톡, 글자들이 떨어지는 순간 상대방의 편지함에 들어가 딩동~ 초인종을 누른다.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편리한 것은 사실이다. 통과! 그러나 잠깐! 딴지를 걸어보자. 과연 속전속결이 좋기만 할까? 아차 실수로 애써 쓴 사연이 공중분해되기도 하고 딜리트 키 한방이면 사라진다. 그러다보니 참을성이 없어졌다. 처음 컴퓨터를 접하던 시절엔 그 빠름에 감탄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영점 몇 초도 지루해져버렸다. 빠름이 참을성을 앗아가고 편리함이 예의를 사라지게 한다.
대화와 문장이 짧아졌다. 기체후 일향만강 하옵시고 가내가 두루두루··· 는 아니더라도 편지지 위에 옮기는 문장이 아니고 또 격식을 챙기지 않고 띄우다보니 본론으로 직행하고, 단어는 강퍅해졌고 예쓰 아니면 노우로 대답하는 간략한 대화법에 익숙하고 생략 내지는 거두절미하는 풍속이 생겨 문장이 짧아졌다. 문장만 짧아진 게 아니라 문법도 손상을 많이 입는다. 국어순화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한다. 파생어를 만들기도 한다. 세대 간의 격차, 식자와 무식자간의 단절이 확연해진다. 그것을 이름하여 신세대문화라고 한다. 찬성? 글쎄! 새것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란 말이 추방되기 전까지는 유효하지 않다. 마치 사과에서 비타민을 섭취하는 것과 비타민 당의정을 먹는 것과 같다. 몸의 영양결핍증에 해당하는 정신의 영양부족, 즉 정서결핍증이 염려된다. 체온이 묻어있지 않아 정이 없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건조주의보가 발효 중일 때가 많다.
스팸과 상업성 광고에 시달려야한다. 무분별하게 쏘아대는 스팸메일과 귀신같이 파고드는 상업성 광고메일에 무차별공격을 받아야한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메일함을 하루만 열지 않아도 백통이 넘게 쌓인다. 쓸만한 내용보다 많은 스팸을 걸러내는 일이 만만찮다.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넘쳐나는 속에서 옥석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대량 살포, 마치 허리우드의 블럭버스타와 진배없다. 도둑맞은 패스워드를 타고 오는 쓰레기 정보는 물론 원치 않는 야동, 바이러스까지 묻어와 전멸당하기도 한다. 불특정다수를 향해 무책임하게 쏘아대는 그것들을 완전 차단하기도 어렵다. 방화벽을 쌓아도 그 화생방의 위력 앞에선 가끔 컴퓨터도 망가지고 은행계좌도 털린다. 그러니 수시점검, 긴장해야한다. 엄청난 스트레스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비밀보장이 어렵다. 패스워드만 잘 지키면 될 줄 알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초보수준의 이야기다. 헤커들은 언제나 우리의 머리 위에 앉아있다. 사용한 흔적을 완전 삭제는 컴퓨터 자체를 박살내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컴퓨터의 어느 구석엔가 지워지지 않는 남아있어 비밀탄로가 나기도 한다. 신정아와 변양균도, 기업과 정치판의 검은 커넥션들도 그래서 파헤쳐졌다. 믿을 게 못된다. 행여 남의 눈을 의식해야하는 입장이라면 치명적이 될 수 있다. 오로지 자신의 아날로그식 가슴만이 믿을 수 있다.
어찌됐건 하루도 전자메일함을 열지 않으면 손가락에 가시가 돋을 지경이다. 그 속에 코브라가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중독성. 벗어나기 어렵다. 오로지 철저한 자기 절제력과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우표값 안 들어 경제적인 것 같아도 최소한 삼사년에 한 번씩 컴퓨터를 갈아야 제대로 컴퓨터세대에 진입할 수 있으니 우표값 비교할 바 아니게 고비용이지만 그것도 자본주의의 시류이니 어쩌겠는가 폼 나게 살려면 폼값을 지불해야 한다.
요모조모 따져보니 좋은 점이 나쁜 점도 되고 나쁜 점이 좋은 점이기도 하니 어쩔 것인가. 우리들 삶의 페턴도 시류를 따라야 하니. 자본주의를 나무라면서도 자본주의적 생활에서 한치도 못 벗어나는 것과 같다. 요즘 책으로 출간되는 편지모음들이 눈길을 끈다. 아버지의 편지를 모아 엮은 딸, 아들에게 보낸 편지모음을 엮은 속에 들어있는 어머니의 마음, 연인끼리 주고받은 수 백 통의 편지는 터치 한 방에 가는 전자메일 같을까. 귀중한 물건 다루듯, 애써 책으로 엮는 것은 역시 정성이 담긴 손편지는 지워버리면 그만인 전자메일과 비할 바가 아니라는 증거이다. 손편지가 언젠가 싹트기를 기대하는 마음의 씨앗그릇임에 틀림이 없다. 손때 묻은 문갑이거나 혹은 오래 간직하고 싶은 나전칠기 함(函)이거나. 연방우편공사가 돈 걱정을 내세운 차제에 우리는 메말라가는 심장 한쪽을 걱정해야한다. 얼른 주위를 살펴 누구에겐가 손편지를 써 보내자. 써 보낼만한 상대가 없다면? 사람은 많은데 내 사람은 없고,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 우리의 삶이 그쯤 가고 있다는 의미이다. 길모퉁이에 선 우체통이 사라지기 전에 소중한 사람에겐 서둘러 손편지를 써 보낼 일이다. 우체국까지 가는 동안 마음이 설레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편지를 부치고 우체국을 나와 하늘을 한번 보는 기분, 유난히 상큼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2012,5,15,화><20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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