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아버지 쟁탈전 * 권 천 학

천마리학 2012. 11. 15. 04:53

 

 

 

아버지 쟁탈전 * 권 천 학

 

 

아버지를 서로 모시겠다고 쟁탈전이 벌어졌다는 소식 들어보셨나요? 신판 효자전(孝子傳)이라도 나왔나하고 귀가 트이지 않나요?

노인 백세 시대의 물결에 실려 급부상한 노인 백수 시대가 사회적 국가적 잇슈로 떠오르면서 심각해지고 있다.

노인문제는 노인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노인들을 부양해야하는 젊은 세대들의 어깨까지도 짓누르는 것이 현실이다. 백세장수시대가 양지(陽地)라면 노인문제는 양지가 품고 있는 음지(陰地)하고 할 수 있다. 과학의 발전과 경제 환경의 변화로 길어진 인간의 수명(壽命)이 이 시대가 해결해야하는 중요한 문제를 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한 평생을 명암으로 가르는 경계선이 되어버린 셈이다. 장수를 꿈꾸어왔음에도 막상 장수의 문()이 열리니 구석구석에 어려운 걸림돌들이 나타난 것이다. 노인문제는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양상이 다르긴 하지만 오래전부터 있어온 인간 본연의 문제이기도 하다. 농경시대에는 노인의 노동력상실로 인하여 쓰임새가 없어져서 푸대접이고,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돈의 가치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고 따라서 재산(財産)이 없는 노인은 푸대접이다. 그러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윤리관과 혈육이라는 뜨거움이 버텨주고, 사람을 사람답게 해준다.

조부모, 부모, 손자세대의 3대가 함께 어울려 살던 대가족의 가족형태가 보편화되었던 시대를 지나, 소위 신세대라고 일컬으며 부부중심 형태의 가족제도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노부모부양은 난제(難題)로 불거지기 시작했다. 부부 단둘이서 알콩달콩 살다가 자식새끼 낳아 오순도순. 노부모는 가족 순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노부모 모시고 화목하게 잘 사는 가족들이 실제로는 더 많은 줄로 알고 있다. 하지만 심심찮게 들려오는 노인학대, 노인 방치, 독거노인등의 문제가 드러나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래 들어 안 모셨던 노부모를 다시 모시거나 혹은 경제적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노부모 슬하에서 얹혀살겠다는 젊은 커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이 시대의 흐름이라고 하지만 그 또한 자식세대의 이기적인 생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얄밉다.

경제적인 이유 외에 노부모와 함께 살겠다는 또 하나의 이유는 육아문제 때문이다. 부부중심으로 살아보니 자식 기르는 일이 만만찮다. 그래서 늙은 부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 또한 부모는 영원한 부모이고 자식은 영원한 자식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또한 얄밉다.

 

 

 

자식의 초청으로 이 나라로 이민 신청을 했을 때, 초청우선 순위조항에서 떨어져 사는 부부가 1순위이고, 자식이 2순위이고, 부모가 3순위였던 것을 알고 잠시 씁쓸했던 기억이 새롭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도 내가 받은 구시대적인 교육관 내지는 유교적 효()사상이 머리에 박혀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어찌됐건 부모를 모시는 일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시대가 내 생각대로 흘러가주지 않는다. 그래서 장수시대가 되었음을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노인들이 많은 것에 대해서 안타까운 심정이다.

어느 자식이라고 부모걱정 안되랴. 하지만 이러저러한 역경 때문에 효를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이해한다고 해도 가끔 접하게 되는 놀라운 뉴스들로 인하여 사람임이 부끄러울 때가 많다. 이런 마당에 아버지 쟁탈전이라니…… 듣기에 따라서는 좋은 일일수도 있으련만 내면에 서린 안 좋은 일이 있겠거니 하는 부정적인 선입견이 먼저 스치는 것 또한 이미 지금의 세태를 너무나 깊숙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나만이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노인 문제는 쉽게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옛날식 효()사상이 이미 낡은 시대적 윤리관이 되어버려서 자식들에 대한 기대도 신뢰도 할 수 없게 된 사회적 불신에 동의, 동조한다는 뜻이다.

 

얼마 전 분당경찰서에 한 노인이 어떤 중년남성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신고가 접수되었다. 조사에 나선 경찰은 그 노인이 작은 아들 집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알아내었다. 납치범으로 지목된 중년남성은 큰 아들이었다. 큰아들이 작은 아들집에서 머물고 있는 아버지를 강제로 데려오자 작은 아들은 아버지가 납치됐다고 신고했고, 큰아들은 미국에서 살다 귀국하여 한국에 서 살게 된 작은 아들이 아버지를 납치해갔었다는 주장이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어딘가 석연찮긴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를 서로 모시려고 하는 형과 아우 사이의 쟁탈전이다. 즐거운 쟁탈전이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파고들수록 쓴 물이 난다. 87세인 아버지는 공시지가 40억 원 상당의 건물소유자로 매달 1천여 만 원의 월세가 들어온다. 그리고 치매를 앓고 있다. 경찰의 조사가 끝난 뒤, 우여곡절 뒤에 아버지는 작은 아들집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아버지를 모시고 가려는 작은아들의 차를 큰아들 부부가 온몸으로 저지하는 바람에 치매에 걸린 아버지는 일곱 시간 동안이나 화장실에도 못가고 갇혀있었다고 한다. 웃어야할까, 울어야할까?

경찰은 큰아들을 사법처리 하지 않기로 사건을 마무리했는데 중요한 이유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자신이 납치당했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점이라고 한다. 치매 덕을 봤다고 할까.

서로 생모라고 주장하며 아이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두 여인에게 생모(生母)와 양모(養母)를 가리기 위하여 아이의 팔을 양쪽으로 잡아당겨 찢어서 반씩 나눠가지도록 하라는 판결에서 손을 놓은 사람의 손을 들어준 솔로몬의 재판이야기가 아깝다.

그동안 우리가 들어왔던 늙은 부모 학대와 폭행들과 무엇이 다를까.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너무나 치사한 막장 극이다.

 

얼마 전에 이곳 토론토근교에서도 자식 믿고 한국에서 온 노부모를 쓰레기통에 오래 동안 방치한 소식이 우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 외에도 심심찮게 전해오는 노인 학대와 폭행, 늙은 부모 유기, 심지어는 살해하기에 이르기까지 하는 사건들은 늘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따라서 개인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사회적 국가적인 측면까지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서는 전체 인류의 삶을 전면적으로 짚어보게 한다.

서로 늙은 부모를 모시지 않으려고 하는 자식들,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거리를 방황하는 늙은 부모들, 자식들의 내침에 분노하고 사회적 냉담에 절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도 종종 있다. 우리는 이런 세태를 기막혀하며 혀를 찰 수밖에 없다.

치매로 인지능력이나 판단능력이 없는 늙은 부모에게 돈이 무슨 소용이며 재산이 무슨 힘이 되는가. 자식들 사이에 불화와 갈등만 조장하게 되었고 부끄러운 막장극의 주인공을 만들었을 뿐이다. 대개는 돈이 없어 문제인데, 돈이 있어도 문제다. 돈 때문에 빚어지는 역겨운 꼴들이 어찌 이 일 뿐인가. 그때마다 우리는 끌끌 혀를 찰 뿐이다.

자식들도 이미 중년을 넘어서 5십대 전후인 사람들이 어찌 그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했을까. 판단력 없기로는 아버지가 앓는 치매보다 더 중증이다. 교육부재, 양심부재등등의 단어들을 새삼스레 들추어 보는 것조차 헛바퀴 도는 기분이다. 아버지만이 아니라 자식들도 그저 불쌍하다. 그야말로 돈이 웬수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노심초사해가며 온 정성을 다하여 기른 자식인데,

어렸을 때는 부모가 이 세상에서 못하는 게 없고 안 되는 게 없는 슈퍼맨 같은 부모였는데

나이가 들면 부모가 아니라 단지 부양해야하는 늙은이로 전락하는 불행한 경우를 어찌해야 할까. 부모 모시기가 이처럼 어려운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니 부모가 어찌 마음 놓고 늙어갈 수 있을까. 그런 사람들에겐 백세시대-다잉(well-dying)’이니 하는 말들이 다 부질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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