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친정어머니를 자청(自請)한다

천마리학 2012. 9. 18. 02:23

 

이 글은 북한을 탈출하여 토론토에 자리잡은 자유북한인협회(탈북민 커플들)의 합동결혼식에 대한 글이다.

지난 8월초, 한국일보에 토론토의 훌륭한 남자분들 10명이 친정아버지 역할을 한다는 기사가 났다.

나는 그 기사를 보고 친정어머니를 자청하는 글을 한국일보에 보냈고, 8월9일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부동산캐나다의 고정 칼럼(8월24일)에도 발표되었다.

나의 글이 한국일보에 발표된 후에, 주최측에서도 나의 뜻에 호응한 모양이다. 

친정아버지만 정한 애초의 계획을 바꾸어 각 쌍마다 친정어머니를 정했다.

처음엔 10쌍이라고 발표되었지만 희망자가 많아서 15쌍으로 늘어났다.

9월 15일 토론토시청 중앙홀에서 합동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나는 그 행사에서 '안서희 오주원'커플의 친정어머니 노릇을 했다.

친정아버지는 중국인문화센터회장인 Dr. Ming-Tat Cheung 씨였다.  

 

 

친정어머니를 자청(自請)한다 * 權 千 鶴

 

 

자유북한인협회의 합동결혼식, 나는 그 합동결혼식 주인공인 열 쌍 신랑신부에게 친정어머니를 자청한다.

 

토론토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연히 돈 리(Don Lee)라는 분을 알게 되었다. 백년 전통을 자랑하는 영국브랜드의 유명이발소에서 일하는 분으로 고급단골고객이 많은 일류이발사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는 어느 날, 곧 은퇴를 하고 봉사 차 북한으로 떠날 계획이라고 했다. 아직 은퇴할 시기는 좀 남아있는 연세였다. 뜻밖의 말에 적이 놀라서 언제 돌아올 거냐고 물었더니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들어보니 이미 북한 어딘가에 시설을 짓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하루라도 빨리 가고 싶은데, 북한의 시설이 아직 마무리 되지 않아서 기다리는 중이었고, 그때까지 일을 계속하는 상태였다. 그분의 말은 들음들음으로 알고 있는 북한의 실정에 때문에 솔직히 말하자면 선 듯 이해가 가지 않았으며 염려가 더 컸다. 나의 그런 생각과는 달리 여생을 북한에 가서 봉사와 선교로 마치겠다며 희망에 차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더욱 놀라웠다. 말려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의혹이 서린 채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쯤 북한 어디엔가 봉사와 선교에 열심일 돈 리 선생의 의욕에 차서 발그레하기까지 하던 곱상한 얼굴을 상상하며, 부디 건강 무사하셔서 뜻이 바로 펴지기만을 바란다.

 

 

 

 

 

그 후 초기이민자이신 이 선생님으로부터 영화 클로싱’ DVD를 선물 받았다. 영화를 보면서 많이 울었다. 나이답지 않게 울었다. 사춘기시절 러브스토리를 보고 한 일주일 울었던 이후, 영화를 보고 그렇게 가슴이 아파서 울어보긴 처음이었다. 영화의 예술성이나 완성도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일, 목숨의 일, 이데올로기의 문제였다. 구시대의 산물인 정치 이데올로기에 치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망가져야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크고 막막한 어둠이었다. 축구선수 출신의 아버지와 맨땅에서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먼지 일으키며 축구를 하던 유일한 행복, 그 행복을 상상하면서 낯선 사막의 황야에 스러져가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분노가 치밀었다.

여러 해 전 몽골에 갔을 때 나는 반()사막화 되어가는 몽골의 초원 한 가운데에 서서 자연의 준엄함과 함께 거칠고 막막해서 숨이 넘어갈 듯한 치명적인 아름다음을 맛보며 황홀했었다. 그야말로 사치였다. 내가 무심했던 바로 그 초원의 여윈 풀 더미 아래 끝내 아버지의 손을 잡지 채 목숨이 끊겨 흙자갈 아래 묻혀있었다니.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열 살 어린 소년의 주검이 그곳에서 밤과 이슬에 젖어 떨고 있었다니.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마음이 저려온다. 새끼를 가진 어미. 동물적인 감상이라고 해도 좋다. 슬픈 것은 슬픈 것이다.

 

 

 

 

 

이년 전 캐네디언 친구의 초청으로 이니스 타운 홀에서 북한 영화들을 보았다. 영화문법상 상황설정과 연기자들의 복장이 안 맞아서 어색한 것조차도 북한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놀라운 일과 재미있는 일을 겪었다.

본 영화에 앞서 북한에 다녀온 토론토의 한인 동포 2세인 젊은이가 북한에 다녀온 과정을 찍은 다큐를 상영한 후, 그 다큐 속 젊은이의 아버지가 직접 무대로 나와서 북한을 찬양 하는 사상발언을 했다. 왜 하는지조차 으아스러웠는데 발언내용이 한국에서라면 상상도 못할 내용이었다. 북한이 세계유일의 성공한 사회주의 국가이며 김정일은 세계최고의 지도자라는 것. 지금까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북한공산당의 의로움과 인간적임이 증명이 된다는 이상한 논리를 펴면서 북한찬양을 했다. 모순(矛盾)의 논리로 공공연하게 북한을 찬양 하다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캐나다가 동화 속에 나오는 나라로 착각되어질 정도였다. 이래서 캐나다는 진정한 자유주의국가인가? 묘한 착각까지 하면서 듣는 그 분의 주장은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이해 불가(不可),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오는 동굴이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재미있는 일은 그 다음에 생겼다.

그분의 이야기가 끝나자, 북한이 좋으면 북한으로 떠나지 왜 캐나다에서 혜택 받고 사느냐는 캐네디언들의 힐책성 질문에 가고 싶지만 지금 북한이 어려운데 자기까지 가면 부담이 될까봐서 북한 사정이 좋아지면 가려고 좋아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점입가경이었다. 아니 이런 것을 첩첩산중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나도 의문이 생겼다. 30년 동안 서울에서 KBS의 교향악단 단원생활을 했고, 1995년경에 토론토로 이민 왔다면 얼핏 계산해 봐도 그분이 북한에서 살았던 기간이 없어보였다. 그럼에도 저토록 북한을 찬양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손을 들었다. 바로 내 뒷자리의 사람이 지목되었다. ?

2008, 나는 한국이민가정을 주제로 한 단편영화 'The Banquet'의 주인공을 맡아 출연했었다. 그 해 토론토단편영화제에서 상연된 그 영화에서 나의 남편 역()을 했던 헤밀턴씨가 바로 지목된 질문자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질문을 끝으로 질의시간이 끝나고 우리는 오랜만의 만남을 반가워했다. 그때 내가 당신이 내 마지막 질문기회를 가로챘다고 농담을 했는데 고맙게도 그가 주선을 해서 로비의 벤치에 발언자와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 자리에서 물었다. 북한에 몇 년 사셨느냐고.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고 했다. 열 일곱 살 때 산내면(山內面)에서 인민군에게 끌려가 빨치산 노릇을 했는데 사흘 만에 어리다는 이유로 그분만 돌려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때의 경험으로 인민군들이 얼마나 인간적인지를 안다는 것. 그것이 북한을 찬양하는 이유가 되다니. ! 놀라워라! 그 단 사흘의 체험으로 평생을 이처럼 동굴에서 사시다니! 이념이 과연 무엇일까!

 

 

 

 

 

금년 7, 북한영화제를 딸과 함께 관람했다. 하루 종일 앞자리에 앉아서 관람하는 우리 모녀를 보고 영화 사이사이 진행을 맡은 사회자가 막간 인사로 고맙다는 멘트까지 했다. 그 자리에서 허태섭 자유북한인협회 회장의 합동결혼식 이야기를 들었다. 이미 보도를 통해 알고 있는 일이었다. 얼핏 그깟 결혼식이 대순가. 지금 죽어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조하는 것이 급선무지, 하는 생각이 지나갔다. 그러나 어느 교회에서 모금운동으로 돕는 일이라니 돕는 일도 상황에 따를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고쳐먹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북한에 대하여 조금씩이나마 관심을 갖게 된 대강의 경로이다.

 

 

 

 

사실 그동안 여러 루트를 통해서 북한에 대한 소식을 알기는 했지만 언제나 촉각은 핵문제나, 근래에 있었던 도발행위 등 우리의 안보 쪽에 더 세워졌었다. 이번의 북한 영화제를 통해서 북한동포의 참담한 생활과 인권유린의 심각성, 탈북민들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더 헤아리게 되었다. 하여,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는 중에, 토론토의 훌륭하신 열 분 남자 어른들께서 합동결혼식 날 신부의 아버지가 되기로 했다는 한국일보 기사를 보았다. 막연하게 그랬으면 좋겠다고 한 생각이 실제로 이루어져서 반갑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친정어머니를 하겠다고 자원한다. 외롭고 힘든 그들에게 마음의 위로가 더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그들이 부모와 함께 지낼 수 있는 상태였다면 대사(大事)를 앞두고 오순도순 의논을 하며 일을 풀어나갔을 터인데 생면부지의 나라에서 얼마나 그리울까. 실제 친정어머니의 백분의 일도 못되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마음의 의지가 되어주고 싶어서다. 며칠 동안 마음을 궁글려 축시도 써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