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장 뜨자! 흑룡의 해! * 권 천 학
연말연초면 늘 그렇듯, 올해에도 누군가로부터 토정비결보기 메일이 왔다. 평소에 운수니 점이니··· 하는 것들을 별로 믿지도, 즐기지도 않는 편이라서 그런 메일이 오면 그냥 지워버렸다. 한편으론 궁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믿지도 않는, 믿고 싶지 않은 궤를 찾아내어 마음을 끄달리게 되면 결국 시간 낭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어서였다. 간혹 본다고 해도 그뿐, 나오는 궤 역시 살아보면 터득하게 되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번엔 그저 재미삼아 맞춰봤다. 사실 나 개인적으론 흑룡의 해에 대해서 썩 좋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 임진년 하면 탁 임진왜란부터 떠올랐다. 한국전쟁이 가장 치열하던 때도 1952년 임진년이다. 아버지의 등에 업혀 둔덕 아래 숨어서 마을 앞 다리가 폭파되는 모습을 지켜보던 기억이 생생하다. 검은 색은 오방(五方)의 북쪽을 의미하고, 생(生)과 사(死)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무슨 조화인가. ‘석양 귀객 보보망망이라. 뉘엇뉘엇 석양이 지는데···’로 시작된 올해 나의 운은 어디 한 구절 무사한 구석 없이 좋지 않은 운세였다. 임진년의 이순신장군이 이랬을까. 양력과 음력의 풀이가 다르면서도 둘 다 나쁘긴 마찬가지. 아무리 재미로 봤다지만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면서도, 기분이 별로였다. 은근히 걱정도 스미기 시작했다. 차라리 보지말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찝찝한 기분을 없애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가 문득 기분 잡쳐 있으면 있을수록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어디 한번 살아보자. 얼마나 나쁜지! 맞장 한 번 떠보자! 결국 오기가 발동하여 그렇게 마음을 바꾸고 나니 한결 홀가분해지긴 했다.
한번 생각해보자. 60년만이라고 해서, 용이라고 해서 다 좋은 걸까? 일찍이 음양오행을 만들 때는 다 좋은 의미만을 포함시키진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삶이 한 가지로 평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알기 때문에 음양도 만들고 오행도 만들어 그 안에 좋고 나쁨을, 어둠과 빛을, 추위와 더위를 다 챙겨 넣었을 것이다. 좋은 땐 어려울 때를, 따뜻할 땐 추울 때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해서, 지혜롭게 어려움을 예방하고 극복해나가도록 하기 위해서 고루 배합하고 배열해 만들어진 것이 음양오행이고 그것을 맞춰 궤를 모은 것이 토정비결일 것이다. 그런 의미로 해석해보면 최고의 기대치를 위해서 상징적으로 만든 용 역시, 십이지의 다른 동물들과 등가(等價)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굳이 따지자면 청룡, 황룡 등 색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고 의미에 따라 역할도 다를 것이 분명하니 흑룡의 검은색이 지니는 의미를 새겨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엔 전쟁도 있고 평화도 있다. 겨울도 있고 여름도 있고 오르막과 내리막도 있다. 넘어야 할 산도 있고 건너야 할 바다도 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천당과 지옥, 극락이 있다고들 한다. 정말 있을까? 확인 불가능한 논리에 휘말리기 앞서,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자. 지금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있지만 지구 어디에선가는 전쟁으로 불타고 있다.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죽음이 진행되고 풍요 뒤에서 누군가는 굶고 있다. 전쟁만 있으면 그것이 바로 지옥일 것이고, 겨울만 있어도 오르막만 있어도 지옥일 것이다. 그렇다고 평화만 있으면 좋을 것인가. 아니다. 평화만 있어도, 여름만 있어도, 내리막만 있어도 마찬가지다. 음과 양이 적당히 배합되어 있어야 천당이며 극락이다. 천당과 지옥, 극락은 멀리 사후(死後)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 앞에 있다.
‘황금돼지’ ‘백호’ ‘백말’ 이제는 ‘흑룡’··· 거기다 물과 불까지 붙여가며 법석을 떨다니. 의미를 추가하여 여성과 약자의 인격과 인권을 차별하는 이유로 삼았던 것이 우매한 명분이었음이 명백해진 시대에 살면서, 글로발과 첨단의 과학세상을 즐기면서 흑룡의 해라고해서 들뜨는 것은 모순이다. 흑룡띠의 아이를 출산하려고 애쓰는 사람들, 흑룡의 해라는 팻말을 걸고 분위기를 달구는 마켓팅에 비즈니스에··· 줄줄이 줄줄이다. 갓 쓰고 자전거 타던 개화기의 우리 선조들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보다 더 어색하다. 경고를 미리 받은 셈이라 생각하고 감히 운과 맞장 떠볼 요량을 하는 것이다. 토정비결의 궤에 이끌려 실망하거나 핑계 삼는다면 그것은 바로 시간낭비만이 아니라 인생낭비가 되기 때문이다.
날짜를 조작해가며 출산한 부모나 아이나, 미국국적을얻기 위하여 원정출산하는 엄마들, 흑룡의 갈기에 휘둘리며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있을까? 기대할 수 있을까? 나의 금년운세가 나쁘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라 경제가 불안한 안개주의보에 싸여있고, 특히 건축과 조선분야의 금년 경기는 하향곡선이 예측되고 있다. 여전히 불과 물은 존재하며 언제 어떻게 덮칠지 모른다. 흑룡의 해, 방심하지 말고 좀 더 주의해가며 진중하게 살아내야 하지 않을까. 보이지 않는 이면을 짚어가며 슬기롭게 흑룡의 강을 건너는 지혜가 필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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