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 * 권 천 학
잠시 다녀가는 가을을 따라 숲길 걷다가 불바다 만나 화들짝 걸음을 멈춘다 누가 질렀을까 이 큰불! 확 버리고 싶다
타오르던 갈망으로 목 마르던 팔색조 힘겨운 날개짓으로 떨어트린 깃털 한 개 바람에 날리고 있을 먼 섬의 산굼부리 어딘가도 새별오름 어딘가도 지금쯤 타버린 재로 허옇게 허옇게 날리고 있을 텐데
내원군 응진전 앞마당에 가득 깔린 단풍잎 부처님 참 흐뭇하시겠다 잘 익어 목숨의 깃 여미고 조용히 내려앉아 열반에 든 수 많은 제자들 확 타버리고 싶었던 마음도 함께 다비(茶毘)에 들었으니
<메모>
가을산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내 가슴속에서도 불이 난다. 지나온 시간들이 앞다퉈 불꽃을 피운다. 그 불꽃 속 어딘가에 타지 못한 옹이 있어서 숯검댕이 되지 않기를. 여름 숲을 찾아가면서 ‘녹을 보러간다’고는 하지 않는다. 녹음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그 숲에 기대어 더위를 피하여 쉬고 싶어 간다. 그러나 가을이면 ‘단풍 보러간다’고들 한다. 단풍은 겨울이 되기 전 나무의 마지막 모습이다. 마지막 모습, 다 벗어 보이는 마지막 모습. 그 모습이 얼마나 잘 가꾸어진 것인지 보러간다. 사람은 추우면 옷을 껴입는데 나무는 겨울 앞두고 옷을 벗는다. 추우면 옷을 벗는 사람과 달리 그 역순의 마지막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도 새겨보게 된다. ‘단풍보러 간다’ 아무렇지도 않은 말이지만 아무래도 의미심장하다. 해마다 그렇듯이 이번에도 가을산 단풍이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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