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은 똥 * 권 천 학
닥터 팽이 진료실에서 환자를 보고 있는 동안 이십 칠 개월 된 말썽장이 아리가 이 구석 저 구석 제 맘대로 통통통통 뒤따라 다니며 말리느라 힘 드는 나를 아랑곳없이 진료실 옆의 연구실 문을 벌컥 연다 빈 방, 문 옆에 뼈로 서 있는 사람 실제크기의 인체골격구조 앞에서 아리의 눈빛이 반짝, 나는 긴장 이 삼 초? 짧은 침묵을 깨며 “할머니, 크으다 아줌마” 이어 창가에 있는 오십 센티 정도의 혈 자리 표시 인체모형석고로 눈길을 돌리며 “쁘띠(작은) 아줌마!” 귀여운 표정으로 작다는 흉내까지 낸다
어이없어라 아무 것도 모르는 아리가 해골을 보고 무서워할 거라는 생각 뼈 조각들로 엮어진 인체구조를 보고 놀라리라는 나의 헛다리 지레짐작, 잘못짚은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리가 아니라 많이 아는 나다 겁을 낸 건 이십 칠 개월 된 아리가 아니라 육십 년 넘게 살아온 나다
해골과 뼈들이 어떻게 아줌마로 보이는지 (박제된 뼈의 실제 주인이 여자였을지도……) (그것까지 아리가 꿰뚫어 보았는지도……) 무서움도, 여자 남자의 구별도 없는 이 십 칠 개월 아리 천사 앞에 지식은 똥이구나 ‘크다 아줌마. 쁘띠 아줌마’ 말 배우느라 서툰 발음, 서툰 문법이긴 하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맑은 눈의 아리 천사 앞에 지식은 똥이구나
<메모> 지식과 지혜. 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다 필요한 요소들이다. 둘 다 많으면 좋은 것들이다. 그렇긴 한데, 지식이 많이 쌓아지면 머리가 무겁고 꾀가 늘어 두통이 심해진다. 지혜가 많이 쌓아지면 눈이 맑아지고, 머리가 가볍고, 늘 상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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