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칼럼-우리의 어린것들을 위한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천마리학 2009. 7. 10. 06:28

 

 

 

 

<시사칼럼>

  

      우리의 어린것들을 위한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권 천 학(시인)

 

 

 

오늘아침 우연히도 어린이들에 관한 기사를 세 개나 읽었다. ‘아파트촌 신종님비’라는 제목의 기사와 ‘씨랜드 10주기’에 대한 기사, 그리고 ‘마이클 잭슨의 자녀양육문제’에 대한 기사였다. 모두가 어린이에 관한 기사였지만 모두가 어두운 내용이었다. 그 중 ‘아파트촌의 신종님비’는 좀 색달랐다. 저출산 시대에 신종님비?(Not In My Back Yard) 색다르다기보다 한심스러웠다.

 

내용은 이렇다.

서울의 강남구에 있는 한 아파트단지에 사는 주민들이 ‘상업적 용도’라는 이유로 놀이방, 유아방 등의 어린이집이 들어서지 못하게 하고 있고, 이웃지역까지 영향을 미쳐서 이미 전부터 세 들어 운영하고 있던 ‘어린이집’마저 퇴거를 요구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혐오시설도 아닌 ‘어린이 집’이 거부당하는 것이 타당치 않다는 반대의견도 있어서 해당관청에서 아직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한때 우리는 화장장 건립이라든가 원자력 발전소 등의 건설이 해당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표류하거나 이웃 주민들과의 갈등까지 유발시켜 시끄러웠던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린이 집’이 혐오시설 취급을 받는다면 머지않아 ‘노인 시설’도 같은 처지에 놓일게 뻔하다. 하긴 화장장이 거부당하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그런 취급을 받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어린이 집’은 용케도 ‘상업행위’로 분류된다고 하니 아슬아슬, 참으로 용케다.

‘어린이 집’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이유는 ‘어린이 집이 생기면 시끄럽고, 단지 안에 외부차량이 드나들어 위험하고, 불편하다는 것이다. 더 말할 것 없이 야속하고 한심한 생각이 든다. 그들은 부모가 아닌가? 그 아파트 단지가 지금 노인아파트가 아니라면 그들 중에는 지금 어린 자녀를 둔 부모도 있을 것이고, 한때는 그런 부모였을 터인데… 그들은 자식보다 돈이 우선인가? 해서다. 설령 다소 불편하더라도 ‘어린이 집’을 받아들일 수 없을까?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 아닌가?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감수해야 할 일이 아닌가? 어린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할 어른으로서의 아량은 없는가? 하는 생각으로 너그럽지 못한 어른들에 대해서 야속하고, 집값 떨어질까봐서 반대하는 어른들이 한심하다. 그들이 겉으로 내세운 반대이유도 설득력이 없는데다, 보이지 않는 이유 속에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저출산국가로 분류되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출산비와 양육비를 보조하겠다고 나서며 출산을 장려해도 선뜻 호응하지 않아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판국에 생활의 불편함 때문에, 아니 솔직히 집값 때문에 ‘어린이 집’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다니, 이러한 역발상은 국가 정책을 무시하고 코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근시안적 행위이며, 우리의 미래보다는 현실의 자본주의 논리만 따지는 세태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기사가 된 ‘씨랜드 10주기’에 대한 기사 역시 코앞의 이익만을 추구한 날림공사의 결과였다. 가연성 건축자재, 전기배선 불량, 소방 설비 미흡 등의 이유로 일어났던 경기도 화성의 씨랜드 수련원 화재사건. 그날의 참사에서는 철모르는 19명의 어린이들이 희생되었다. 희생된 어린이가 내 자식이 아니어도 참담함을 금할 수 없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건 후 잡초 무성한 현장에서 10주기 추모 위령제를 지내는 부모들의 가슴은 여전히 슬픔으로 미어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어린이를 위한 시설은 턱없이 부족하고, 환경이나 조건은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마이클 잭슨의 자녀양육문제’에 대한 기사는 지난 23일에 사망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장례가 아직 치루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벌써 3자녀 양육권문제로 마이클 잭슨의 어머니 캐서린과 3자녀의 생모인 로 사이에 법적분쟁이 시작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사건은 아직도 기억에 새로운 우리나라 배우 최진실 사건을 되살려줬다. 그냥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면 안 될까 하는 아쉬움을 느끼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작년에 갑작스런 자살로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던 국민배우 최진실, 그가 남긴 2자녀가 외할머니와 생부사이의 양육권분쟁으로 한바탕 소란스러웠다. 이혼 후 양육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던 생부가 갑자기 양육권을 주장하고 나오자 줄곧 양육을 하며 함께 살아온 외할머니가 당연히 반대하고 나섰다. 법의 자가 들이대지기는 했으나 결국 외할머니에게 양육이 맡겨진 것으로 끝났다. 사회적인 거센 여론도 한몫 했다. 이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사회적으로 떠들썩했던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감정과 여성의 인권문제 그리고 돈 문제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외할머니가 길러올 때는 관심도 없다가 생부라는 이유로 법적 권리를 주장하게 되자, 가족들이 느끼는 배신감이라는 감정에, 어린이의 장래를 위한 염려가 덧입혀져서 반발했다. 가족의 감정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감정까지도 흥분하여 일어났고 거기에 여성 즉 어머니의 권리 내지는 입장까지도 거론되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또한 맨 밑바닥엔 돈이 문제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철없는 어린이들의 앞날을 진정으로 염려하고 진심으로 해결해주려는 의지가 진심이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여론에 밀려 한바탕 풍파를 치르고나서야 양보된 양상이었므므로 돈이 우선이었다는 인식을 면할 수가 없다.

 

마이클 잭슨이 비록 5억 달러의 은행 빚이 있다고 하나, 남겨진 유산과 명예가 훨씬 커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남긴 유산이 없고 빚만 잔뜩 있다고 해도 양육권을 차지하겠다고 나설 것인가? 글쎄다. 단언컨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어린이에 대한 각각의 기사들을 보면서 바로 그것이 우리가 계속해서 고민해야 할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문제이고, 자본주의에 길들여져 오늘을 사는 어른들의 문제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세상이 풍요로워지고, 또 자신의 자식교육이라면 기본을 무시할 정도로 과잉보호, 과잉교육문제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회이면서도 정작 ‘우리’의 아이들에 대해서는 인색하다. 자기 집 수돗물이나 물건들은 아끼면서 공공시설이나 공공화장실의 수돗물은 줄줄이 낭비하는 모습과 진배없다.

우리의 아이들이 편견 없이 불편 없이 자랄 진정한 사회는 없는가? 아직도 어른들은 아이보다 돈을 더 생각하는 자본주의의 맹신자들로 남아야 하는가? 우리에게 던져지는 모든 문제들이 모순을 안고 있듯, 자본주의 역시 우리에게 풍요도 주고 발전도 주지만, 끊임없이 문제도 준다는 사실을, 그것들을 지혜롭게 헤쳐나가는 것이 진정한 발전이고, 그 중에도 우리의 미래인 어린이들, ‘나의 어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어린 것’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은 돈과 이권과 감정에 얽혀들어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노인을 위한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라는 영화제목처럼 아직도 <어린이들을 위한 세상은 없는가?>자문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