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당산나무 頌-88회 생신을 맞이하신 부모님께 바칩니다

천마리학 2009. 3. 28. 05:59
 
 

           당산나무 頌

                   -86회 생신을 맞이하신 부모님께 바칩니다.

 

 

 


 

 

 

 

안동권씨 동정공파 34세손이신 '寧'자 '吉'자 우리 아버지

안동김씨 36세손 '愛'자 '子'자 우리 어머니

역사의 회오리 속에 건너간 일본의 鹿兒島市 宇宿町에서 고향 처녀총각으로 만나 백년가약을 맺음으로 시작된 사랑의 역사

 

첫 열매로 福岡縣 戶畑市에서 千鶴을 낳으셨고

해방 후 터를 잡은 전라북도 김제군 공덕면 황산리에서 '英淑' '五赫' '五昇'을 낳으셨으며

익산시 목천동과 중앙동을 거쳐

김제군 백구면 월봉리 부용에서 막내 '銀淑'을 얻으시는 동안

양조장 정미소 제재소 양계장 등을 경영하시며

콩깍지 속의 다섯 남매를 잘 길러주셨습니다


콩깍지 속의 다섯 콩알 저마다 모습 갖추어

첫째 콩알 '千鶴'은 詩人 되었고

둘째 콩알 '英淑'은 선생님 되었고

셋째 콩알 '五赫'은 정형외과 醫士 되었고

넷째 콩알 '五昇'은 나라의 청렴한 공복으로 사무관 되었고

다섯째 콩알 '銀淑'은 알뜰한 주부 되었으며

어여쁜 두 며느리 '李貴慈' '尹成淑'과

미더운 두 사위 '宋世郁'과 '金允洙'도 얻었습니다


아래로 더욱 번성하여

'千鶴'의 딸 '河那'는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한국학 관장으로

스위스청년 페트릭 에메네게어를 배필로 맞아

샛별 '아리(ARI)'를 낳았고

'英淑'은 의과대학 재학 중인 딸 '貴貞'이와 회사원인 아들 '成大'를 두었고

'五赫'은 독일 수트트가르트 공대에 유학 중인 아들 '형섭'과,

은행원인 딸 '효정', 미국의 예일대학교 음악대학원에 유학중인 딸 '소영'을 두었고,

'五昇'의 두 아들 '경재' '경수'와

'銀淑'의 아들 '영재'가 모두 알토란 같은 고등학생이며 미래의 희망나무로 자라고 있습니다.


금년 2007년의 여름은 4대 외외손 '아리'가 왕할아버지 왕할머니께

새싹인사를 올린 특별한 여름이었고,

오늘, 8월 14일, 86회째 생신을 맞아,

콩깍지 속의 콩알들과 그 내림들, 4대 외손까지 거느리는 큰 나무가 되셨습니다.


출렁이는 세월의 파도 위에서

젊음을 불사르던 시절마저 아득한 지금

서울 특별시 금천구 독산동에서 큰 당산나무가 되어

자손들 가지 뻗어가는 모습 지켜보고 계십니다


돌아보면

타국과 타관에서

뿌리 든든하게 내리느라

바람 불고 비 들이치던 그 많은 세월들

때로는 춥고 때로는 외로웠던 그 시간들이

참 아름답습니다


눈부신 세모시 은발에 구름관을 쓰시고

위로 위로 팔 뻗어 하늘 향해 가지 올리는

햇빛 속의 그 모습이

참으로 빛납니다


그 품에 안겨 싹 틔운 콩깍지 속의 다섯 콩알들

밑으로 밑으로 뿌리 더욱 깊어지는 큰 나무

언제까지나 우리들의 언덕 위에 서서

움 틔우고 꽃 피우는 당산나무이신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

참 고맙습니다


사 ․ 랑 ․ 합 ․ 니 ․ 다


 

*콩깍지 속의 다섯 콩알들과 그 내림들, 4대 외외손 아리까지 온 마음을 모아 86회 생신을 경하 드리며 더욱 건강하신 모습으로 오래오래 저희들 곁에 함께 하시길 기원하고 또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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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천년송처럼


몇 해 전, 아마 서너 해 전 쯤으로 생각된다.

그때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청이 있다. 네가 시인 아니냐? 네가 아버지에 대한 것을 시로 써서 내 묘 앞에 비로 세워주면 좋겠다" 하셨다.

너무나 느닷없는 말씀이었고 또 너무나 아픈 말씀이어서 그땐 아무 대답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묵묵부답. 그냥 그러고 말았다.

그 후로 내내 아버지의 그 말씀은 뇌리에서 아니 가슴에서 맴돌았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해 본 일이 없다. 없다기보다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왜 죽음을 생각해 본 일이 없을까만 그 생각이 날 때마다 가슴은 철렁, 수천 길 벼랑 앞에 서있는 기분이기도 하고 엄동설한 폭풍 속에 내몰린 듯 시리기도 해서 가능한 한 떨쳐버리려고 애썼다.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을 어찌 막고 피하랴.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일이 없다곤 했지만 사실은 일찍부터 생각했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의 특별한 꿈속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애타게 체험했던 일이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꿈과 함께 내 삶의 암시 같은 또 한 편의 꿈은 오래 동안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 삶이 고단하거나 한바탕 모퉁이를 휘돌아 나왔을 때마다 떠올려 보곤 했다.       

 

 

 

 

 

 

 

그 특별한 꿈 두 가지.

그 두 가지 꿈은 꾸기 시작했을 때부터 일정 기간 동안 반복해서 꾸었다.

한 가지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로 기억된다. 3학년쯤?

김제군 공덕면 황산에 살았을 때다.

한 스님이 나를 데리러 오고 나는 그 스님에게 잡혀가지 않으려고 도망치는 꿈이었다.

회색 옷에, 터번같이 생긴 회색 모자에, 회생 바랑을 어깨에 걸친, 동글동글한 얼굴에 키가 작달막한 노스님. 엄지손가락 어디쯤에 조그만 혹같이 불거진 마디가 있었다. 그는 날마다 나를 데리러 왔다. 매우 무서웠다. 그때마다 어린 나는 잡히지 않으려고 도망치곤 했다. 방안에 있다가도 삽작에 그 스님이 들어오는 걸 보는 순간 방문을 박차고 뒷곁으로 돌아서 도망치면 스님도 뒷곁으로 따라온다. 몇 바퀴 그렇게 집을 돌다가 겁에 질린 나는 숨이 턱에 차서 헐떡이며 삽작으로 뛰쳐나가다가 깨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삽작을 뛰쳐나와 동네 고샅을 줄달음치며 뒤 쫒아 오는 스님을 흘긋거리다 깨어나기도 하고, 더 길게는 동네 고샅을 벗어나 큰길가에 있는 학교 운동장을 지나 건너편 들녘으로 도망가다가 깨기도 하고, 파헤쳐진 들녘, 쟁기질된 논바닥 고랑을 힘겹게 넘느라고 헐떡이다가 깨기도 한다. 논고랑이 왜 그렇게 높은 산이던지 아무리 빨리 달려도 속도가 나지 않아 다급해진 마음에 돌아보면  그때도 스님은 여전히 저만큼에서 휘여휘여 따라오고 있다. 그 꿈은 한 동안 반복하면서 나를 괴롭히곤 했다.

  

 

 

 

 

 

 

또 한 가지 꿈.

어머니 아버지가 늙는 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먼저 꿈이 내 인생에 대한 어떤 암시 같은 것이었다면 뒤에 시작된 이 꿈은 부모에 대한 암시가 아니었나 싶다.

이 꿈을 처음 꾸기 시작한 때를 내가 초등학교 5학년쯤으로 기억된다. 그 전에도 가끔 꾸었었는데 그때쯤엔 본격적으로 반복되었다.

 

처음엔 엄마 아빠 그리고 나, 셋이서 함께 길을 간다. 야트막한 등성이, 햇볕이 따사롭고 여기저기 꽃도 피어있다. 그런 양지바른 동산을 도란도란 이야기 하며 엄마 아빠께 재롱도 떨며 가다 보면 어느 사이 넓은 길이 되고, 그 길이 점점 좁아지면서 길 양편이 절벽이 된다. 길은 점점 좁아지고 바람이 심하게 불고 천길 만길 낭떠러지인 양편의 시퍼런 바다에서는 파도가 올려 친다. 길은 좁아져 실낱같이 되는데 파도 칠 때마다 물결 속에 악어가 아가리를 벌리며 솟구쳐 오른다. 바람과 발아래 파도와 파도 속의 악어 때문에 겨우겨우 몸을 가누며 가는데 언제나 맨 앞에 아버지 그 다음이 어머니 그리고 내가 뒤따르고 있다. 실 같은 길이 끝나는 지점에 커다란 쇠문이 있고 그 쇠문 안에서 이글이글 불길이 타고 있다. 걸어가는 순서대로 그 불길 속에 뛰어들게 된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나는 그 사실을 너무나 가슴 아파한다. 내가 아버지 어머니 대신 먼저 뛰어들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래 사신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가겠다고 그 좁고 위험한 벼랑 위의 길은 떼를 쓰며 어머니 제치고, 그 다음에 아버지 제쳐서 맨 앞에 선다. 그러면 아무 말 없이 아버지가 나를 덜렁 들어서 아버지 뒤로 놓고, 그 다음엔 어머니가 나를 덜렁 들어서 어머니 뒤로. 그러면 다시 처음과 같은 순서가 되고 만다. 나는 끝내 앞에 가겠다고 발버둥 치지만 매번 허사가 되고 만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불 속에 뛰어드는 지경까지 이르게 될 때가 있는데, 그 때 나는 아빠~ 하고 목이 찢어져라 소리 지르다가 제풀에 깨기도 하고, 옆에서 주무시던 아버지 어머니까지 깨기도 한다. 꿈에서 깨어보면 벼개닛이 흠뻑 젖어있고 나는 허덕허덕 흐느끼고 있다. 어쩌다 어머니가 '얘가 무서운 꿈을 꾸었나' 하시면서 나를 흔들어 깨우시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끼곤 한다. '무슨 꿈을 꾸었기에 그러냐?'하고 물어오실 때도 있다. 그럴 땐 아니, 몰라요 하고 얼버무리곤 했다. 어린 깜냥에 엄마 아빠가 돌아가시는 꿈을 꾸었다고 말하면 어머니 아버지 자신들이 나로 하여금 '죽음'을 생각하게 되어 슬퍼지실까 봐서 그 말을 비밀로 하곤 했다.

그 때 내가 가장 절실하게 바랐던 것은 아버지 어머니가 늙지 않는 방법이었다. 나무로 닭을 깎아놓을까? 심청이처럼 팔려갈 순 없을까? 내 다리 내놔라 내 다리 내놔라 하면서 등골을 오싹하게 했던 귀신이야기가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까... 어린 깜냥에 벼라별 궁리를 다 했다.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중국의 한 효자가 나무를 깎아 선반 위에 올려놓고 부모님께 저 닭이 울거든 그때 비로소 늙으소서 했다는 이야기가 어린 내 가슴에 얼마나 간절하던지.

 

 


 

 

 

 

그 꿈은 내가 6학년 때 김제 황산에서 이리(지금의 익산)로 이사를 했고 나는 이리 남초등학교로 전학을 했는데 그때까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그 무렵엔 더욱 잦아지고 확실해졌다. 아버지께서 목천양조장을 하셨다. 나는 계속되는 그 꿈 때문에 잠을 설치는 것은 물론이고, 이젠 잠이 들기 전부터 자꾸만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는 근심과 함께 죽음이 더 가깝게 상상되었다.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호호백발로 늙어지는 모습이 그려지고 '고향인 안동이 굉장히 먼데 고향 떠나 사시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외로워서 어쩌나' 또 '아빠엄마가 돌아가시면 우린 어쩌나?'하는 생각까지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훌쩍훌쩍 들키지 않게 울고, 울다보면 천정의 사방연속 무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일그러지기도 했다. 울다가 들키면 '응? 괜찮아요, 눈에 뭐가 들어갔나봐요'하거나 '하품을 했더니...'하고 얼버무리곤 했다.

잠들기 전인 생시에도 들키고, 꿈을 꾸다가도 들키고 자주 그러다보니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과 함께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그때부터 잠자리를 바꾸었다. 일부러 어리광하듯 초저녁이면 벼개를 들고 일어나서 '전주떡 아줌마 방에서 잘래요'하고 옮겨가는 것이었다. 전주떡은 우리 집에서 일하던 부엌어멈의 택호이다. 그런 날이면 전주떡은 자다가 몇 번씩 나 때문에 밤잠을 깨곤 했다.
한동안 계속되던 꿈도 어느 사이 사라지고, 나는 세월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불효자식으로 지금까지 살아오고 말았다.

 

그런데 몇 해 전, 아버지의 청을 듣게 되자 또다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부모에게 불효만 저지르게 되는 자식으로써 회한과 무능함이 마음을 짓눌렀다. 또 그럭저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여전히 불효로 살아가고 있으면서 이번에 아버지의 86회 생신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늘 맴돌던 아버지의 청을 어떻게 할까 고심하는 터에 아버지의 생신축하로 헌시 <당산나무 頌>을 썼다. 매우 조심스럽게.

둘째 남동생에게 이메일로 보내어 생신날 읽어드리게 했더니 생신날 저녁, 온 가족이 모인자리에서 막내가 읽어드렸다 한다.


 

 

 

 

 

 

생신이 지난 며칠 후, 국제전화로 아버지 어머니의 안부를 여쭈었을 때 어머니 말씀.

"예, 은숙이가 읽을 땐 그저 좋구나 하는 생각만 했는데 다들 돌아간 뒤에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기분이 달라"

속으로 덜컥했다. 행여 마음을 다치시진 않았을까 해서. 그래서 아주 조심스럽게 뭐가 다르시더냐고 여쭸다.

"나는 살아온 세월들이 지긋지긋해서 고생한 걸로만 여겨졌는데 네 글을 읽어보니 지난 세월들을 참 잘 살았구나. 행복했었구나 싶더라니까. 이상하지 않냐?"

하시는 것이었다. 휴우~

"엄마, 그런 세월들이 있어서 오늘이 있는 거잖아요. 그게 다 아름다운 거죠. 고생스러웠던 시간들이라도 지나고 보면 아름다운 시간들로 추억되는 것, 좋지 않아요? 엄마 아빠, 잘 사신 거예요"

"글쎄 네 글을 읽어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니까."

"다행이네요"

"아빤 지금 너 오면 돌에 새겨야겠다고 궁리가 많으시단다.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시는 거야. 빨리 와라"

하며 웃으셨다.

내 글을 읽으시고 행여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많았는데 그런 내색이 없으시니 우선 좋고, 정말 좋은 것은, 늘 지나온 과거의 어려운 시간들에게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시던 어머니가 그 글을 통하여 행복한 시간이었음을 느끼게 되셨다는 바로 그 점이다.


이제 조금 안도의 숨이 쉬어진다. 여전히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상심은 크지만, 부디 건강하셔서 90세 넘기시고, 더 건강하셔서 백수하시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제 4대 외손주 '아리'도 보셨잖아요. '아리'가 장가가서 5대손을 낳을 때까지만, 하는 마음만 간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