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중독되고 싶다

천마리학 2009. 6. 2. 22:29

 

 

중독되고 싶다


<중독되고 싶다>

 

 

 

권     천     학 (시인)

 

 

 

나는 한 때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에 중독된 일이 있다. 하루 온종일을 쉬지 않고 듣고 또 듣기를 반복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틀기 시작하여 잠들 때까지 쉬지 않고 돌아가도록 녹음하여 테잎을 앞뒤로 바꿔가면서 들었다. 그렇게 보낸 나날이 아마 한 계절도 더 되었던 것 같다. 어떻게 그 중독에서 벗어났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그 시절이 그립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무반주 첼로곡에 빠져있던 그 시절이 그립다.


내가 알았던 사람 중에 클래식음악에 중독된 사람이 있었다. 80년대였다. 내가 살던 독산동의 남문시장에서 아는 사람이 아니면 눈에 잘 띄지도 않을 것 같은 아주 조그맣고 허름한 털실가게 주인이었다. 그 여자는 수더분한 외모에 말수가 적고 화장기라곤 찾아 볼 수 없고 옷차림도 너무나 수수하여 아줌마로 보일 정도였다. 고개를 숙이는 기분으로 들어가야 하는 그 가게 안에는 언제나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우연히 그 가게를 알게 되어 한 동안 손뜨게를 배우러 다녔다. 서로 말 상대가 되어 이런 저런 속이야기까지 나누게 되면서 나는 그가 돈벌이를 위해서 장사나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장사에 악착을 떨지 않고 그저 손님이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늘 조용하였다. 그가 욕심을 내는 것은 오직 좋은 음악을 멈추지 않고 듣는 것이었다. 아침에 가게문을 열 때부터 저녁에 닫을 때까지 음악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음악 없는 세상을 생각할 수가 없다고 했다. 오디오 기기는 당시에 꽤 이름이 있던 파나소닉 제품이었는데 당연히 그에게는 보물 1호, 재산목록 1호였다. 저녁에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오디오기가 밤을 안녕히 보낼까 염려가 되고,  아침에 문을 열 때마다 별일 없이 잘 있을까 항상 조마조마 하다고 했다. 도매시장으로 털실을 떼러 가는 날에도 오디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해서 웬만한 볼일은 생략하고 서둘러 돌아온다고 했다. 시집갈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음악에만 빠져 지내는 그에게 털실가게는 결혼독촉이나 생활의 간섭을 받지 않고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 놓고 들을 수 있는 혼자만의 유일한 공간이었고 혼자만의 세계였다. 그 지독한 음악 마니아,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여전히 음악에 빠져 살고 있을까. 결혼은 했을까? 흔히들 그러듯이 그 지독한 중독에서 벗어나 결혼을 하고 아이 낳아 기르면서 평범한 아낙으로 살고 있지나 않을까? 궁금하다.

 


 

 

 

 

내가 아는 캐네디언 친구하나는 호러물 수집광이다. 나이가 오십을 바라보는데도 아직도 괴기스럽고 무시무시한 인형이나 조각품이 나오기만 하면 사들인다. 몬스터, 도깨비, 마녀, 드라큘러… 할 것 없이 세계 각국의 온갖 괴기스토리와 관련 있는 것들을 모으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사연이 있는 끔찍한 사건이 얽혀있는 조각들도 거의 가지고 있다. 그가 수집한 물건들은 창고에 그득 쌓여있는데 그의 꿈은 그것들을 다 진열할 수 있는 집을 마련하여 그것들을 모두 진열해놓고 사는 것이다. 그야말로 괴기물 수집광이다. 수집과 중독은 다르긴 하지만 그쯤 되면 일종의 중독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그는 인터넷 서핑을 통해 괴기물에 대한 뉴스를 검색하고, 각국의 괴기물 공장이나 유통업자들이 내놓는 신상품에 대한 정보를 꿰뚫고 있으며 수시로 경매에 응찰하여 배송 받고 있는 중이다. 그때마다 나는 "언제 철들 거야?"하고 핀잔하곤 하지만 사실 그 말은 "미칠 수 있는 당신이 부럽다"라는 말이기도 하다.

 

 

중독, 매력 있는 말이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여 자신을 온통 쏟아 부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재고 계산하고 이리저리 고누면서 약아져야만 손해 보지 않고 사는 세상에서 두 눈을 홉뜨고 경쟁적으로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빠져들어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인가에 맹목적으로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순수하다는 의미이며, 정신적 여유 공간으로 안식할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온갖 스트레스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정신적 무풍지대. 중독된다는 것은 어정쩡 맹숭맹숭 맹물로 사는 것보다 얼마나 짜릿하고 멋진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