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의 수필방

봄병을 앓다

천마리학 2009. 3. 12. 11:27

  

 

봄병을 앓다   *   권     천     학 (시인)

 

 

 

 

 


 

봄인 듯, 겨울인 듯

요즘이 그렇다. 이미 봄의 향기를 맡은 지 오래지만 아직도 날이 선 추위가 바람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이미 입춘을 보내고, 곳곳에서 꽃망울이 터지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꽃샘추위도 따라와서 옷깃을 여민다고 하지만 이곳에선 아직 이른 감이 있다. 그러나 봄이 늦은 이곳이라 해도 곧 봄은 오려니.

며칠 전, 캐나다 산(産) 눈이 쏟아졌다. 창밖의 허공을 가득 메우며 쏟아지는 캐나다 산 눈 때문에 손에 잡힐 듯 지척인 씨엔 타워도 로저스 센터의 둥근 지붕도 지워졌다. 발코니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의 거리에 우뚝 솟아있는 씨엔 타워의 수직과 둥그러스럼한 곡선으로 넉넉함과 부드러움을 느끼게 하는 로저스 센터의 둥근 지붕이 만들어내는 수평의 조화로 이루어진 도시적 그림 한 폭이 사라져버린 셈이다. 대신 18층 높이의 허공에 나를 세워놓았다.   


이곳의 눈은 한국의 눈과 다르고 추위도 한국의 추위와 다르다. 펑펑 함박눈으로 쏟아지는 품새가 한국의 눈이라면 이곳의 눈은 마치 밀가루 같거나 싸라기 같다. 더러 함박눈으로 변하는 것을 본 일이 있지만 그것은 밀가루 눈이 실컷 내린 후에야 조금 섞여 내리곤 했다. 함박눈은 평화롭고 따뜻해서 마치 하늘에서 평화가 쏟아지는 느낌이 들게 하지만 밀가루 눈은 어딘가 답답하고 막막하다. 눈치고는 참 시시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곳은 우리나라보다는 위도 상으로 조금 북쪽이기 때문에 더 추운 지역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곳의 추위는 고추냉이 같이 화끈하게 매운 추위라면 한국의 추위는 춥되, 달콤하다. 추위 속 어느 구석엔가 푸근함이 스며있는 추위. 나만의 생각일까. 이곳의 추위는 주로 바람을 동반하고 우리나라의 추위는 주로 햇볕을 동반한다.

어떻든 나는 지금 밀가루로 쏟아져 그림을 지우는 18층의 허공을 마주하고 펑펑 하늘에서 쏟아지는 평화 같은 함박눈을 즐기던 시절을 추억하며 막막하게 서 있었다.


나는 새들새들 앓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 잠시 한국에 다녀온 온 후라서 그런지, 전과 같지 않게 편도선도 붓고 간헐적으로 두통도 동반했다. 제틀랙도 향수병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누가 물어오면 제트랙인지 향수병인지 모른다는 짚어주는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다. 봄병이라는 것을. 

사실 나는 이맘때쯤이면 으레 앓는 지병이 있다. 어디 딱 꼬집어 말할 만큼 아픈데도 없고 그렇타고 아프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저 시들시들, 허기지고 어질어질 부대낀다. 둥둥 떠서 날아가고 싶은 충동, 해토의 물렁물렁한 땅을 박차고 아지랑이를 타고 하늘에 오를 것만 같은 기분, 볕 바른 곳에 서기만 하면 내 몸 어느 구석에선가 뾰족뾰족 새싹이 틀 것만 같은 두려움, 그런 것들이 꽃망울 터지듯 조여 오는 달짝지근한 아픔, 내가 습관처럼 앓는 봄병의 증상이다.


"세상에 무슨 일이래? 글쎄 아버지 산소에 다녀오는 길에 기차를 탔는데 임실 근처에서 창밖으로 보라색 꽃무더기가 보이지 않겠어. 무슨 꽃인지 가까이서 볼 순 없었지만 아무리 온난화라고 하지만 그래도 지금이 정월인데 말야."

잘 도착했느냐는 안부의 첫 전화를 걸어온 친구가 한 말이다.

"미친 거지 뭐. 불황에 범죄에 세상이 하도 야단이니까 계절도 미쳐가는 거야. 계절이 미쳐서 봄도 길을 잃은 거지 뭐"

나도 세상 탓을 하며 맞장구를 쳤다.


2월, 음력으로 치면 아직도 정월이다. 계절과 봄의 중간지점이다. 가는 겨울과 오는 봄이 서로 조우하면서 빚어지는 일이 왜 없겠는가. 그래서 늦추위도 있고 꽃샘추위도 있다. 몹시 추운 겨울 어느 날에 느닷없이 쏟아지는 봄날 같은 볕이 생경스러우면서도 횡재한 기분이 들듯 봄에 내리는 눈도 더욱 생경스러우면서 정겹다. 옛날엔 그런 날이 어쩌다 있는 일이었지만 근래엔 자주 있다. 아예 계절이 앞당겨지거나 길을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기후의 온난화를 염려한다. 온난화는 공해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변화되면서 파괴되는 생태계를 염려하고 우리가 적응해야 할 미래의 생활환경이 두려워서다.  


조금 늦게, 혹은 조금 이르게 오더라도 봄은 올 것이다. 그런 중에도 봄은 꼭 올 것이라는 믿음을 우리는 가지고 있기 때문에 멀리 혹은 가까이 오고 있을 봄을 그리 염려하지는 않는다. 다만 지금 당장 더 큰 걱정은 보폭이 늦어지는 계절의 변화가 아니라 불황의 늪에 빠져 갈피 못 잡고 있는 코앞의 세상이다. 널뛰기하는 환율, 조만간 몰아닥칠지도 모른다는 공황의 위기감, 일자리를 나누면서라도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하는 것이 이 봄의 걱정이다. 습관적 봄앓이에 덧붙여진 이번 봄의 봄앓이 증상이다. 

아하, 그러고보니 두통은 아마도 내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느라고 그랬구나. 새싹이 나려는 아픔 때문에 편도선도 부었구나. 그랬었구나.


와병 중에 눈 가득한 창가에 서 있으니 잠시 세상걱정은 멀어지고 허공에 둥둥 뜬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날개만 있으면 날 것 같았다. 날아볼까? 잠시 세상사에 찌들어야하는 일상사를 내려놓고 훨훨 날아볼까?

신들린 것처럼 행장을 갖추었다. 그리고 그날 새들새들 봄병을 앓고 있던 나는 캐나다 산 눈이 내리는 낯선 거리 속으로 사라졌다./